게시판
통일과 간도회복..고대사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1.02.02 조회: 3043
통일과 간도회복..고대사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강단사학에서 이병도의 반도식민사관을 완전히 탈피하여 단재 신채호의 민족자주사관 정착에 공헌한 인물이 윤내현이다. 이병도제자들이 장악한 반도식민사관론자들의 음해매도와 비아냥을 과감히 물리치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양심적인 사학자다.
-----------------------------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생의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했다.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과 단군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다.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경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등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고조선사연구회 회장, 단군학회 회장 등 역임


 저서

《상왕조사의 연구》, 경인문화사, 1978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4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외 다수

 

 

고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명이 청동기 연대다. 청동발명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이며 인류문화사에 혁명이었다. 군사력과 정치, 사회가 확대되는 청동기시대를 국가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은 고대 우리 민족 영역이므로 이곳의 모든 유적을 자료로 하면, 만주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문화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서기 전 2410년이고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유적도 서기 전 2370년경으로 우리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서기 전 24~25세기가 옳다. 이는 청동기문화가 황하문화보다 200여년 앞서고 중국 하(夏)나라보다 150년 앞서는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윤내현 교수)

통일과 간도회복..고대사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윤내현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이제 고조선은 실재국가다.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도 서기 전 20~15세기로 바뀌었다.
고조선이 국가로 인정됨은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구조나 법 등 그 내용이 전혀없어 아직은 고조선 역사에 점하나 찍은 것에 불과하다.
지금도 국사교과서 등 우리 역사서는 ‘위만이 고조선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우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건국되었다’로 되어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핵심은 ‘고구려는 한민족이 아니다’와 ‘고구려가 한사군의 땅 가운데에서 건국되었으니 중국’이란 주장이다.

교과서에 고조선 내용까지 바뀌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이는 중국사서의 옛 기록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만반한(滿潘汗)을 경계 삼았다는 기자조선의 위치와 한나라 행정구역 한사군 위치가 열쇠다.

기자조선은 망명한 상나라 제후 기자의 후손, 기준이 서기 전 190년경 요서 난하유역에서 왕이 된 정권이다. 서기 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 땅에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고조선 서부 국경지대에서 기준과 위만, 한 무제가 흥망을 거듭하는 동안 고조선은 요동지역과 북만주 및 한반도에서 존재했지, 중국 통치를 받거나 중국에 통합된 적이 결코 없었다.

다만 진개와 위만, 한 무제와의 3번에 걸친 큰 전쟁으로 고조선은 서부 영토를 크게 빼앗기고 국력이 쇠진된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철기생산이 시작된 이후 농기구 개발로 영토와 경제 개념(富)이 점점 발달하고 땅을 차지하려는 침략이 비일비재 일어났다. 그런 혼란과 전쟁으로 흔들린 중앙체제 조선은 부여국을 비롯하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한, 백제, 신라, 가야국 등 크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지고 모이는 분쟁을 거듭했다.

우리 학계, 청동기 유물에 대한 방사성탄소측정을 하고도 그 연대를 낮게 잡고 있어

 

고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명이 청동기 연대다. 청동발명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이며 인류문화사에 혁명이었다. 군사력과 정치, 사회가 확대되는 청동기시대를 국가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은 고대 우리 민족 영역이므로 이곳의 모든 유적을 자료로 하면, 만주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문화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서기 전 2410년이고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유적도 서기 전 2370년경으로 우리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서기 전 24~25세기가 옳다. 이는 황하문화보다 200여년 앞서고 중국 하(夏)나라보다 150년 앞서는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은 홍익인간 이념이 중심이 된 선교(仙敎) 문화에 있었다

 

유물에 대한 방사성탄소 측정연대가 나오면 그 물건이 첫 번째가 아닐 것이기에 추정연대를 보통 200~300년 전으로 올린다. 특히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검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태로써 우리나라 청동기 시작은 휠씬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문화재위원으로 있던 당시 창원에서 30톤이 넘는 큰 고인돌과 청동검이 발굴됐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수치는 서기 전 9세기 정도였다. 논문을 위해 정확한 연대가 필요해서 박물관에 전화로 물으니 서기 전 4세기란다. 어째서냐는 물음에 담당자의 답변은 “그건 연대가 너무 높아서 사용할 수가 없어서요”다. 과학적인 연대측정을 하고서도 수정연대는 커녕 오히려 500년을 깎아내려 비과학적인 추정연대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실정이다.

가장 오래된 청동기문화가 있으면서도 이제껏 우리 문화를 불교와 유교문화에서 찾았다. 삼국시대는 이미 불교가 왕실과 귀족들의 상층문화였고 고려 후기부터는 유교문화가 상층문화였다. 우리 것을 모르고 외래 것을 우리 것으로 아는, 정체성 없는 민족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이념이 중심이 된 ‘선교(仙敎)’문화가 있었다. 우리 민족의 문화원형에 불교문화가 혼합되고 그 위에 유가문화가 입혀지고 다시 서양문화가 덧입혀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순수한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당당했던 국가체계를 세우기 위해 고조선의 사회이념과 가치관, 문화와 주변국과의 대외관계, 경제수준 등 그 역사를 찾아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

[윤내현 교수]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은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 결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 공격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보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 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 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 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학문 연구를 하는데 강단과 재야라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 교수인데 필자를 강단 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필자가 일부 사학자들을 식민 사관을 가진 학자라고 비난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 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 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 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 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차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 생활에만 정진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영토는 민족사의 영역이라고 헌법에 규정해야 한다

 


                                              100년 전 조선영토(노란색)


[환단고기]가 증언하는 단군3조선 영역도
[환단고기]에 보면 산동반도아래 양자강지역까지를 회.대라 했으며, 번조선 단군의 관리감독을 받는 지역




단군조선연구의 권위자이자 고대 갑골문.문헌연구의 전문가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가 설정한 단군조선의 최저 마지노선 영역(난하 위쪽의 하북성지역까지는 단군조선의 영역이다)-국제법을 위반한 일제에 의해 100년 전 대한민국의 영토인 간도를 양도받은 지나국은 우리민족의 터전이자 단군조선의 영역이였던 하북성.만주.연해주 지역까지는 대한민국에 토해 내야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윤내현 교수 인터뷰>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의 업적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쭉 활동해 오신 까닭에 직접 뵙기는 처음입니다. 고향 해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하하, 내 고향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예요. 흰백字, 포구포字, 白浦理...그보다 공재선생의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 더 잘 알까? 백포리, 옛 백방포(백포)는 백방산, 망부산 등 전설이 살아 있는 곳으로 백포 들머리 신방리 연방죽의 그림 같은 풍경이 유명하지요."

"아,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시인의 후손이시군요"

"공재(恭齎) 尹斗緖께서 9대조 할아버지가 되지요. 그 분이 고산의 증손자이시니까 孤山은 나한테는 12대조 할아버지가 되시고... 또 고향마을에는 집안 형님되시는 크라운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의 생가도 있고 백포리는 해남윤씨 자손들이 대대로 한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지요."

"'크라운 산도'로 유명한 크라운 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님은 작고하시기 전에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만, 사업가라기보다 과자만드는 장인이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요. 형님은 평소에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를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병상에서도 과자샘플을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셨죠. 그게 오늘 날 크라운이라는 장수기업의 원동력이 된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역사공부를 하게 되셨는지, 그 중에서도 고대사연구에 빠져들게 되신 연유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시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천만예요. 나는 과학자가 되려고 했어요. 고향에서 현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때 목포로 갔는데, 자녀들 교육 때문에 목포로 이사해 사업을 벌이신 선친께서 그만 사업에 실패를 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대학을 못갈 것 같아 목포공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던 아인슈타인박사의 『아인슈타인, 나의 세계관』이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분이 생전에 유엔에서 한 연설 중 외교관이나 정치인들에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 하소연을 하는 대목이 있었지요. 어린 마음에 '과학자가 이래서 되겠는가'하는 실망이 오더군요.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에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차라리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하자' 이렇게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에 접근하려던 한 청년을 역사쪽으로 밀어내 버렸군요. 덕분에 우리에겐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장이 열린 셈이고…"

"1960년대에 동양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하게 된 거예요.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없어 어렵게 자료를 모아 논문을 썼지요. 석사논문 제목이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는데 교수님들이 내친김에 박사학위논문까지 쓰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쓴 박사논문이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지요. 그런데 '선배교수들 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없는데 몇 년 후에 제출하면 어떤가'라는 말도 있었고 '우선 심사나해보자'라고도 했는데, 당시 논문심사를 하신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님들이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질문들을 해요. 당시 빈약했던 학계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요. 학위심사가 끝나고 집에 오니 장충식 총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저녁 늦게 총장님댁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대뜸 발령장을 만들어놓았다고 학교에 남아있으라는 거예요. 갑골문이라는 특이한 분야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는 한국 고대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연구에 몰두해 계셨군요"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가 너무나 부족해서 1년 후에 결국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K.C. 장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교수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당시 중국과의 국교가 이뤄지지 않아 학술교류도 무척 어려웠던 때였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홍콩의 용문서점을 통해 중요한 자료들을 구하고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은 다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의 근현대사까지 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고대사만도 너무 자료가 많은 거예요.

복사한 것이 상자로 60박스나 되었지요. 그 자료들을 기반으로 쓴 책이 '중국의 원시시대'라는 책입니다. 이후 기자가 실존인물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우리를 지배했다 해서 자존심 상한다고 뺀 것인데 역사연구는 정확히 실체를 규명해야지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그 때 한국사를 정리할 여력이 없었고 단지 문제만 지적해 다른 학자들이 더 연구하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주위상황이 내 뜻대로 가게 놔두지를 않더군요."

"그러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고대사연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셨다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982년에 앞의 내용을 중심으로 '기자신론'이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내가 중국의 사서와 갑골문의 연구로 밝힌 기자는 '상(商)나라 즉 은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이라는 것,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닌 국경 근처 변방으로 기자는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지요. 즉 단군조선은 기자를 예우하여 은나라와 동일하게 제후로 봉하여 단군조선의 변경인 국경 지역을 맡게 한 것이고 기자가 다스린 고조선의 변경은 지금의 베이징 옆인 갈석산과 난하일대라고 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갈석산 동쪽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지요."

"논문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죠. 더구나 중국사전공의 젊은 학자에게 권위가 침탈된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보였는데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논문발표회 때 대선배 교수 한 분은 노골적으로 책상을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폐쇄적이고 학연ㆍ지연의 벽이 높은 학계에 비해 오히려 언론이나 일반 국민의 관심은 컸습니다. 동아일보의 김중배논설위원이 횡설수설에서 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다뤄주었고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화가 왔어요. 문화부장과 셋이서 점심을 먹으면서 '민족의 고향, 고조선을 가다'란 특집을 기획해 두 달동안 연재를 하기도 했지요."

"그동안의 일반적 통설과 다른, 교수님이 주장하신 고조선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요약하긴 어려운데 우선 고조선은 실제로 있었는가? 그 연대와 위치는 어떠하며 인근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 체제 등에 관한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신화라고 생각하는 단군왕검과 고조선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로 봅니다. 문헌적 기록뿐만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방사성탄소 실험결과 기원전 2400년 정도의 것으로 판명돼 단군조선의 실재 가능성을 확인시켰지요."

"워낙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가시다보니 대학강단에 계시면서도 비정통역사학자니, 국수주의자니 하는 오해도 많이 받으셨죠"

"한때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오해도 받았고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러나 최근에 고대사 특강에 청중이 몰리고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부는 걸 보면 그동안 외롭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무엇이며 우리가 수천년 전 고대사를 연구하는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라기보다 그 사건 속에서 정신과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우리는 '홍익인간'을 주창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분이 다르면 같이 하지 않는 중국과 달리 우리민족들은 남녀노소 차별없이 연일 먹고 마시고 가무를 즐겼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불교·유교처럼 지배계층의 이념으로 작용한 외래문화가 유입되기 전의, 온전한 민족 원형은 고조선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학의 뿌리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고대사 연구가 무척 취약하다는 게 큰 문제지요. 망실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대사를 통해 되찾아 이를 후대에게 바로 가르치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곡된 역사기술을 바로잡기 위해 자료더미 속에 묻혀 사시고 새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감내하며 묵묵히 연구와 저술작업에 매진해 오신 교수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작년말로 고조선학회 회장 일을 넘기고 공식적인 활동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그동안 책에서 이해가 잘 안됐던 부분을 보완하고 쓰는 작업을 계속해야지요. 또 나이가 들어가니 오랜 친구, 고향의 선 후배들과 만나는 것이 낙이기도 합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 두륜회라고 재경해남향우들이 만나서 고향이야기도 나누곤 하는데 바로 오늘 저녁이군요. "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 호남대 겸임교수>

제목
안씻고 더러운 중국인을 비웃은 고려인들. 2011.02.02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곳 (7 ~ 9) 2011.02.02
통일과 간도회복..고대사 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 2011.02.02
전.중공수상 <주은래>의 한국고대사 인식 . 2011.02.02
몽골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일링 덥틀거(한국의 문화침공)"란 용어. 201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