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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는 민족주의자가 아닌 악질친일파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1.07.24 조회: 2735

 

 

 

인촌 김성수는 민족주의자가 아닌 악질친일파
학병 강요로 학생들을' 대동아성전'이라는 죽음의 땅으로 내몬 친일파
 
신운용박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기사입력  2011/07/19 [14:32]
 
 
 
우리는 민족운동가들의 헌신과 투쟁으로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될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된 나라의 앞날에 미·소에 의한 분단과 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실현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배자 일제와 일정한 협력을 통하여 민중 위에 군림하던 친일파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던 백성들의 희망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친일파들을 자신의 전위세력으로 활용하였다. 그에 따라 친일의 상징이었던 동아일보 과 조선일보세력은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현재도 이들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친일세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사의 사주였던 김성수이다. 

김성수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시인 김상훈(金尙勳)이 『문화일보』에 구체적으로 기사를 싣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성수를 친일파로 확정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친일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른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죄값’을 갚는 길임에 분명하다. 친일문제가 그 때 정리되었다면 한국은 더 큰 발전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 고려대 부근 도로명을 친일파 김성수의 호를 딴 '인촌로'로 변경하는데 대한 항의 현수막

 
김성수의 성장과정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仁村里)에서 김경중과 고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나 세 살 때 큰 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다. 16세 때 서울에서 만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유학을 갔다. 송진우는 김성수의 중앙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의 사장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김성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현실인식에 대해 송진우가 일제에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던 반면, 김성수는 저항보다 일제에 순종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도일은 송진우와는 달리 성장기에 심어진 일본에 대한 환상 속에서 일본에 대한 동경심의 발로였다. 일제의 한.일병탄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김성수가 도쿄 유학생들의 반일투쟁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 후 홍명희의 안내로 동경을 돌아본 김성수는 일본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이 때 김성수는 일본을 타도의 대상이 아닌 순응해야 할 ‘주인’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1910년 4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8월 22일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자 송진우는 울분에 분노하여 귀국하고 말았다. 또한 홍명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에 반하여 김성수는 나라가 없어지는 비극에 직면하고서도 어떠한 행동으로도 나서지 않고 끝까지 학업에만 충실하였다. 정치학에 관심이 깊었던 송진우와 달리 그는 경제학에 집중하였던 것은 일제의 한국침탈이라는 민족의 현실보다는 자신만의 미래설계에 치중했던 것이다. 

현실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김성수는 1911년 가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교로 진학하여 대학의 낭만을 즐기는데 열을 올렸다. 이러한 김성수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목숨을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하던 국내외의 민족운동가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학장인 오쿠마를 한국침략에 앞장 선 침략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본받고 싶고 존경해야 할 인물로 받들었던 것이다. 특히 오쿠마를 “그 국가적 공로를 생각하면 오직 경복할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던 사실에서 그에게 국가란 바로 일본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시기(18세∼ 24세)를 제국주의를 선(善)으로 강조하는 일본의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은 그가 일제의 침략논리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업확장에만 열을 올리는 김성수
 

▲고려대 본관 앞에 서있는 김성수동상. 설립자인 이용익선생의 동상은 어디에 있는가?
24세가 되던 해인 1914년 와세다대를 졸업 후 귀국하여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친부와 양부의 도움으로 중앙학교(中央學校)를 1915년 인수하였다. 본과 3년 +교원양성을 위한 특과 1년 6개월인 이 학교는 유근교장, 안재홍학감, 김성수평교사로 시작되었다. 1921년 3월 25일 중앙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되어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김성수는 송진우와는 달리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105인사건으로 안창호의 대성학교가 폐교되는 전례에 비추어 중앙학교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둘째 송진우와 현상윤 등이 그를 보호하였기 때문이라고 『인촌 김성수전』에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30여명의 중앙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연행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3.1운동 당일 경성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는 등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립투쟁보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시작하는 등 경제활동에 열을 올렸다. 

동아일보사는 1920년 4월 1일에 첫 호를 발행하고, 김성수가 1920년 7월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의 정당성을 한국인에게 심어넣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다. 탄생자체가 민족의식의 확장과 독립추구라는 시대적 당면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성수가 경성방직, 동아일보,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의 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은 주로 김경중과 김기중이 제공한 것이다. 김경중의 재산은 1918년부터 1924년까지 큰 폭으로 증가하여 1924년에는 2,000정보가 넘는 대지주가 되었다. 당시 재산을 단기간에 불릴 수 있는 방법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대한 협력과 소작농에 대한 착취라고 할 수 있다. 김성수가문의 재산증식은 군포항에서 일본으로 나가는 쌀 판매와 소작농 착취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김성수의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창설, 중앙학교 인수에 들어간 돈의 성격은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볼 수 없다고 하겠다. 

1932년 3월 26일 김성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의 이름으로 이용익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였다. 그런데 김성수의 전기에서는 김성수의 보성전문학교의 인수를 마치 민족교육을 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보건데, 보성전문학교의 인수를 “민족의 미래를 위한 고심에 찬 선택”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와세다대학을 세워 유명해진 오쿠마를 존경했던 그가 교육권력을 얻고자 했던 욕망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성수의 본격적인 친일행각 

소도회는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 내의 ‘사상범(독립운동가)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김성수가 이런 소도회(昭道會)의 이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성수는 일제와 일정한 협력 속에서 교육사업과 실업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만 매진하였던 것이다.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에 부정적이었던 김성수
김성수는 1936년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결국 동아일보는 1936년 제4차 정간을 당하였고,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을 백관수로 교체하고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을 받아들여 1937년 6월 3일자부터 속간되었다. 이는 곧 김성수가 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는 심지어 주택의 철문 등 약 2백관을 마차에 싣고 일본해군무관부로 찾아가 ‘적 격멸’의 탄환에 보태라고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김성수의 친일행각은 크게 ① 시국강연회 활동, ② 일제 관변단체 참여, ③학병지원 강요 · 언론활동 등으로 집약된다.

1) 김성수의 대략적인 친일 시국강연회 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일제의 선전활동에 동참하여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에 하였다. 1937년 9월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열린 학무국 주최의 전조선시국강연대회에서 시국강연을 한 사실이 있다. 

2) 김성수가 참여한 여러 친일관변단체의 성격은 ‘조선임전보국단’의 강령에서 엿볼 수 있다.
一,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황국정신을 선양하고 사상의 통일을 기한다.
一, 우리는 전시체제에 즉하고 국민생활의 쇄신을 기한다
一, 우리는 근로보국의 정신에 기해서 국민개노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一, 우리는 국가우선의 정신에 기해서 국가채무의 소화저축의 여행물자의 공출산업의 확충에 매진하기를 기한다.
一, 우리는 국방사상의 보급을 도하는 동시에 일조유사지추에 의용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한다. 

김성수가 한국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데 혈안이 된 단체의 이사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능동이건 피동이건간에 '반민족행위’임이 분명하다. 이에 반하여 김성수의 최측근이자 동아일보의 핵심인사인 송진우는 반민족단체에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었다. 이는 김성수가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3)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김성수의 친일 언론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43년 11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학도병 지원율이 저조한 원인은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김성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하였다.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선배의 부탁-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에서 “완전하고 위대한 신민(臣民)이 되어 황도(皇道)를 선양하는 것이 즉 우리들의 최종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고 선동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문과를 폐쇄하고 이과로의 전환을 강요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안」을 1943년 10월 13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10월 14일자 「만반준비 다할 뿐 - 김보성학교장 말」에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안’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또한 1943년 10월 20일 육군성령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으로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는 등 일제의 폭압정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3년 11월 초순 총독부 경무·학무국장이 김성수를 비롯한 보성전문의 보직교수를 불러 학도지원병의 저조함을 질타하였다. 그는 일제의 전시동원시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11월 5일 오후 2시부터 조선군사령부 에가미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였다.

무엇보다도 김성수의 친일성향은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자 「제복이 군장으로 늠름한 자태 -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대의에 죽을 때 -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 에 잘 드러나 있다. 위의 글을 정리해보면
① 완전한 인간은 곧 윤리적 인간이고 이는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② 그 의무는 바로 ‘출전’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③ 교육자의 양심으로 학생들에게 의무를 다하기 위해 출전하여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④ 일본인은 황민으로서 3천년동안 의무를 다해왔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은 30년밖에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본인보다 솔선하여 대동아전쟁에 나가서 죽어야 한다. 

이러한 청년들을 향해 “일제를 위해 죽으라.”는 김성수의 협박은 이어졌다. 대략적인 것은 들면 다음과 같다. 그는 『매일신보』 1943년 11월 8일자, 「필승의 결전장으로! -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 본사주최 - 천재일우의 호기회 - 학도보다도 부형의 분기촉구」에서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한국 사람들의 문약에 있으므로 그 의지를 굳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더 분발해서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 청년들을 몰아세웠다.

『매일신보』 1943년 12월 8일자, 「절대로 협력-보전학교장 김성수 말」에서 그는 “이러한 학병들을 위하여 또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금후 출정할 반도출신 장병들을 생각할진대 군의 원호업이 한층 확대 강화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데 이번 조선 금융단에서 20만원을 제공한 것은 일개 쾌사가 아닐 수 없다.”라고 하여 침략전쟁을 위한 일제의 원호사업을 미화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 1944년 1월 22일자, 「“징병”이 닥쳐 온다 - 군인원호사업에 한층 분발하자」 에서도 한국 사람으로 하여금 징병에 응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원호사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에 들어와서도 김성수는 일제가 전쟁을 대비하여 식량증산 사업 출정식에서 “제군은 오늘까지 귀엽게 자라난 연한 몸이지만 영예로운 증산전사로 나서느니만치 약간의 불편과 피로쯤은 꾹 참고 오로지 입영한 것 같은 생각으로 온갖 정성을 기우려 증산전에 매진하라”고 훈시하였다. 이에 대해 한 학생이 “형들이 출진하던 그 때의 감격을 가슴에 깊이 지니는 한편 오늘까지의 여러 선생님의 간곡한 교훈을 잊지 않고 성심껏 일 하고 오겠습니다.”라는 답사를 하였다. 이는 바로 김성수가 학생들을 일제의 먹이로 전락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김성수의 친일행각은 1944년 7월 22일 일본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더욱이 그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국장과 중추원 서기관장으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던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1945년 7월 8일 보낸 편지에서도 보듯이 김구 등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서 향후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집중하던 시점에서조차 일제에 대한 충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고려대 일제청산위원회로부터도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혔던 교주 김성수

 
김상훈의 김성수의 친일행적 문제제기

이와 같은 친일행적에 대해 해방 후 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시인 김상훈(金尙勳)이었다. 그는 『문화일보』의 지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본격적으로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비판하였다. “내가 아니 우리 학병이면 누구나가 불같이 김성수를 미워하는 연유를 조선인민은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놈은 일가의 번영을 위해서 우리를 죽은의 땅으로 내보내고 왜왕에게 견마지력을 다해서 기름진 고기 덩어리를 얻어먹다가 8.15가 닥쳐와 일본놈들이 망하니까 다시 털끝만한 반성도 자기가책도 없이 거만스럽게 회전의자 위에 어마어마하게 당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시 조선인민을 착취.탄압해보려는 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학병의 원수 영원한 인민의 적인 김성수를 내가 끝까지 타도하는 것이 오로지 의분과 바른 전열에서 나온 것이요 털끝만한 무리나 불순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공언할 수 있다.” 이처럼 김상훈은 김성수를 ‘친일파’, 민족반역자’, ‘학병의 원수’, ‘영원한 인민의 적’이라고 단죄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싱가폴을 함락했을 때 너희들이 뭐라고 위협했는지 아느냐? 나는 굳이 피해서 마침내 어느 해변으로 징용을 갔었지만 처음 지원병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때 이광수와 함께 온 것은 김성수였다. 선배라는 이름으로 『한번 죽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든 그 마귀(魔鬼)같은 징그러운 인상이 형제 어쩌면 그렇데 똑같이 반역의 피를 논아 조선청년의 필망을 애원하는 것이냐...”라고 김성수를 ‘마귀’로까지 단정하였던 것이다.  

김상훈은 김성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 높여 다음과 같이 김성수의 친일행각을 강력하게 응징하라고 주창하였다. 삼일운동의 피를 팔아서 사장 교장 언론인이 되고, 학병의 피를 팔아 감사 이사가 되고, 민족의 피를 팔아서만 잘되는 놈들아! 다시 너희들 당수니 전당중심인물이 『반란』으로 얼마나 인민의 피를 흘리게 하고 (중략) 그리고 또 어느 나라에 조국을 팔아먹은 다음 자치운동을 합네 하고 인민의 선혈을 강요할 것이냐! 너희들의 처단을 위해 학병은 언제나 너희들을 인민재판장에 끌어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김상훈의 김성수 비판은 해방공간에서 한국 사람들이 김성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은 친일파뿐이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어 

하지만 1948년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김성수를 조사하지 못했다. 이는 친일세력의 건재와 친일파 창산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정권의 한계에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문제는 겨우 2009년 11월에 와서야 일정하게 극복되었다. 그럼에도 김성수에 대한 미화작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김성수의 존재는 단순히 역사청산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김성수와 관련하여 지적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친일파로 죽은 김성수를 살려내어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세력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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