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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이승만 암살 미수사건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1.08.03 조회: 3017

1952년 이승만 암살 미수사건
저격자 "그때 권총 탄환이 발사되지 않은것이 한이다"
 
정진호 기자 기사입력  2011/07/26 
6·25 전란이 한창이던 1952년 6월25일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는 ‘6·25멸공통일의날’ 기념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이승만의 훈시 도중 단상 뒤 VIP석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승만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는 불과 3m 남짓, 하지만 탄환 불발로 저격은 실패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의열단(義烈團) 출신 유시태(柳時泰·1890~1965·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였다.

62세의 유시태는 민주국민당 소속
김시현(金始顯·1883~1966·가운데)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유시태와 김시현은 같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두 사람은 일제 때부터 의열단원으로 상하이를 비롯해 해외 각처에서 일본인들을 공격했다가 10여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에 이어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 사실상 암살 사주 혐의로 김시현 의원 역시 체포됐다. 이때 부산은 이승만이 재선을 위한 ‘발췌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치파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두 달 뒤인 8월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사실심리에서 암살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고 답한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고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申性模·1891~1960·전 국방장관)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김시현은 자신은 30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살인·파괴를 해 온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70세의 노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정한 기력으로 명쾌하게 응수했다고 전한다.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석방될 때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은 53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소했다.
김시현(金始顯, 1883년 ~ 1966년 1월 3일) 
아호가 재밌다. 그가 일제의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한다.
검사가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었다고 한다.  이후 본래 학우(鶴右)였던 호를 하구로 바꾸어 버렸다.

29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하여 1919년 만세시위 때 경북 상주에서 상주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일단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광복 활동을 펼쳤다. 자금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외를 드나들며 거사를 벌이고 체포 투옥되는 일을 광복 때까지 반복했다. 당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최대의 신임을 받았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 시도에
가담하다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거기서 평생의 동지요 연인이 된 신여성 권애라(權愛羅)를 만나 상하이로 돌아온 후 결혼했다.

당시 본부인은 고향에서 집을 지키다 1930년 사망했다. 14살 연하의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1919년 만세시위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망명하여 상하이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동하다 1945년 신징(新京)감옥에서광복을 맞이하였다. 1973년 작고하였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22년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에 가담, 1923년 3월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 암살과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당시 경찰간부이면서 의열단원이었던 황옥(黃鈺)과 공모하여 무기와 화약을 들여오려 한 소위 ‘황옥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0년에 출옥했다. 황옥은 당시 경부(警部)로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과 의열단에 포섭되었다는 설이 있다.

1930년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난징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5년간 투옥되었다. 1943년 다시 체포되어 1년간 복역,
1944년 또다시 체포되어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출옥하면서
고려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여 1950년 2대 민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그는 1952년 백범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여 저격을 시도했다.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 …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 죽여 버리겠다. … 한번도 진실로 애국자가 되어 본 일 없는 그이니 이번에 자기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비로소 한번 애국자 노릇 하라고 하지.”
1952년 6월 25일 유시태((柳時泰, 당시 62세)를 통해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 저격 계획이 실패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시태(柳時泰, 1890년 ~ 1965년)
이상준(李相俊), 유시창(柳時昌) 등으로 불리웠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충청남도의 당진·예산 등지에서 선전부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21년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3년 2월
권정필(權正弼)·남영득(南英得) 및 동향출신의 유병하(柳丙夏) 등과 함께 의병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내자동에 살던 부호 이인희(李麟熙)의 집을 찾아가 5,000원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독립자금의 출연을 강요하던 중 3월 3일 잠복중이던 일본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시국비방죄로 다시 1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李承晩)독재정권에 불만을 품고 1952년 김시현(金始顯)과 6·25기념식장에서 이승만저격하였다.
그러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하여 이듬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던 중 1960년 4·19의거로 석방되었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공동으로 속해 있었던 의열단에는 ‘7가살(七可殺)’이라는 맹세가 있다.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창단할 때 처치해야 할 일곱 부류의 인간들을 규정했다. 총독부고관, 군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토호가 그 대상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을 그 대상으로 지목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의열단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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