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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결사항쟁, 우리는 일제에 이렇게 싸웠다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1.08.03 조회: 4502
항일결사항쟁

1907년 해아밀사파견(海牙密使派遣)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항일결사항쟁은 일본의 침략을 제어하는 임무를 띠고 상하시민(上下市民)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 일으켜 미증유의 시민봉기를 실현시켰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두텁게 형성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1910년 이후로부터 1945년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민족적인 항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민권수호 및 국권강화운동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이준(李儁) · 양한묵(梁漢默) · 윤효정(尹孝定) 등은 정치적 결사가 허용되지 않자 교육과 계몽을 표방하고 1905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민중을 깨우치는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그들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일방 일진회(一進會)의 친일성 · 매국성을 규탄하였다.

을사5조약이 체결된 다음해(1900) 4월 2일에는 이를 더욱 확대 강화, 대항하기 위하여 발기인 20여 명이 윤효정 집에서 회합하고 안병찬(安秉瓚) · 한영복(韓永福) · 유석태(柳錫泰) · 박주헌(朴周憲) · 임병항(林炳恒)의 5명을 임시간사로 선출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창립을 선언하였다.

그 회칙은 16조였으며[註2] 중심 인물은 윤효정 · 장지연(張志淵) · 나수연(羅壽淵) · 심의성(沈宜性) · 안병찬 · 정운복(鄭雲復) · 윤치호(尹致昊) 등으로[註3] 독립협회 해산 이후 약 7년만에 그 운동에 관련되었던 민중 부르조아 계층 인물을 포함 각계 각층을 망라한 강력한 교육 자강단체임을 표방하였다.

설립의 목적과 취지는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함으로써 자국의 부강을 계도(計圖)하여 독립의 기초를 만든다[註4]'고 그 성격을 천명한 뒤 전국에 25개의 지부와 기관지로 자강회월보를 발행하면서 홍보활동과 계몽을 전개하였으니, 교육과 자강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문화운동의 첫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회장으로 개화파 윤치호를 선출하였는 바, 취지문에서 자강이 곧 독립이며 이것을 부강(不講)하면 끝내는 멸망할 것임을 엄숙 경고하였고, 실제로 5년 내에 완전히 적중한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은 재론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의무교육의 실시, 악질적 폐습의 금지, 조혼금지요청, 형법개량 주장, 일본문 교과서 편찬 시정 등을 정부에 건의하여 반봉건운동을 시사하였으며 표면으로는 교육과 계몽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는 등 군국 일본에 항거하기 위한 민족독립정신의 각성과 선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키 위해 대한자강회는 의주나 동래 등 남북으로 회원을 다수 파송, 국민계몽강연을 개최함과 동시에 교육기관의 창설의욕을 북돋았다. 따라서 정운복(鄭雲復) 등의 서북학회(西北學會)(1908.1.11 설태희(薛泰熙) 등의 한북학회(漢北學會)와 이갑(李甲) 등의 서우학회(西友學會)가 통합됨)[註5],1808년 1월 19일 천연정에서 발회(發會)한 이용직(李容稙) 등의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경기 · 충청인사모임[註6]) 장지연(張志淵) 등의 영남학회(嶺南學會)[註7] 고정주(高鼎柱) 등의 호남학회(湖南學會) · 남궁억(南宮檍) 등의 관동학회(關東學會) 등 교육 흥학(興學)의 모임과 1907년 11월 29일 발족한 유길준(兪吉濬) 등의 흥사단(興士團)[註8] 1907년 3월 14일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註9] 이옥경(李鈺卿) 등의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등에서는 각기 기관지로서 자강회월보, 소년, 한반도, 야뢰, 서우(西友) 등 월보, 학보와 잡지 및 강연을 통해 본래의 의도한 바대로 일제침략에 저력적으로 항거하였다.

그러나 큰 국민적 여론을 조성하였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는 조직된 지 1년 6개월도 못된 1907년 8월 21일 이완용 내각에 의하여 해산당하고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계승, 김가진(金嘉鎭)을 회장으로 삼아 기관지 (대한민보=사장 오세창 · 발행겸편집인 장효근 1910.9.30폐간)[註10]를 통해 실력양성과 지식향상을 절규하여 1909년 2월에는 60여 개의 지부까지 두는 등 저변으로 크게 확산하였으나 한때 일진회와의 타협도 있었다. 그러나 1909년 12월 4일 일진회가 소위 한일합방성명서(韓日合邦聲明書)를 내자 결연히 반대하고 그 성토를 위한 국민대회를 발기하였었다.

여하간 대한협회는 1909년 7월 1일 시국에 대한 의견서 형식으로 일본 정부의 탄압을 규탄하고 한국 정부의 국민위주적 국운개발을 촉구하였다. 이 의견서 요지는

1. 통감정치의 대한정책은 성실관대할 것
2. 통감정치는 한국 2천만 민중을 중심으로 시정개선을 도(圖)할 것
3. 한국정부는 인민의 여론을 존중 실천하여 국운을 계발할 것
4. 지방소요 의병의 진정은 외국병 파견을 중지하고 지방진위대(地方鎭衛隊)를 재흥하며 한국인경찰대를 증설할 것
5. 일본인 관리임용을 감축할 것
6. 지방관 추천범위를 확장할 것이고(경제상 의견은 생략) 교육상 의견으로는 비교적 자유주의를 채용할 것
등으로 이는 반봉건성의 강조와 독립 자유주의 고취 및 시행성격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1904년 7월 11일에는 심상진 · 원세성 · 송수만 · 이상설 등이 보안회(輔安會)를 조직,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분개하여 황무지 개척안을 철회토록 앞장을 서서 맹렬히 공격하여 경제적 민족주의의 색채를 농후하게 하였고 1906년 4월 4일 평양에서는 이봉주(李鳳柱) · 방흥주(方興周) 등이 민회(民會)를 조직하고 교육확장을 주장하였으며 동년 4월 10일 의주인 박영운(朴永運) 등이 보민회(保民會)를 조직하고 교육발달과 환난상구(患難相救)를 절규하였다.

1907년 2월 이후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에서는 매 일요일마다 변사(辯士)를 초빙하여 교육상 필요한 연설을 하는 등 일반국민의 지식을 계발하는 발표회를 가졌으며 같은해 1월 11일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 회장 권중현)에서는 민충정공(閔忠正公)의 관일(貫日)한 정충대절(貞忠大節)을 들어 독립사상, 애국사상을 고취한 바도 있다.

교육확장을 목적으로 표방한 대동광문회(大東光文會, 대구광문사문회의 개칭)가 중심이 된 1907년 2월 이후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전국적으로 파급된 바 있으며1907년 3월 9일 한만용(韓萬容) 등이 서울에서 설립한 보인학회(輔仁學會)는 교육열이 강한 인사들의 모임으로 보인학교도 설립하였거니와 교육입국론(敎育立國論)을 주장하였다. 교육확장을 통한 애국운동은 해삼위(海蔘威)에서 별세한 이용익(李容翊)의 유소(遺疏)에도 잘 반영되고 있다. 즉 그는 국가 독립이 인재교육에 있은 즉 학교를 많이 세워 인재육성의 배출을 주장하고 경향각지에 사립학교를 다수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1909년 3월 4일 상해(上海) 한국인 단체인 대동보국회의 부회장인 고광준(高光駿)은 동 2월 상순에 입경하여 상동(尙洞) 소재 불국교회(佛國敎會)에 체류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출입하여 보국론(保國論)이란 인쇄물을 배포,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북돋았다.

그 외 1909년에 조사된 학회로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회장 이겸래) · 개성학회(開城學會, 대판(代辦) 한교서) · 회령사민학회(會寧四民學會, 회장 전제억) · 문화학회(文化學會, 회장 박경순) · 돈의학회(敦義學會, 대변 이순하) · 대한중앙학회(大韓中央學會) · 함남교육회(咸南敎育會, 회장 권영호) · 공진회(共進會, 회장 尹孝定) 등이 교육과 계몽을 표방하였으나 내실은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구국적 문화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비밀단체로는 1907년 1월에 안창호(安昌浩) · 이승훈(李昇薰) · 이갑(李甲) · 이동휘(李東輝) 등 20여명이 조직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지적할 수 있다. 이 회는 주로 정신교육 민족 정신 함양에 심혈을 기울여 유지의 희사금을 토대로 그해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 윤치호)와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여기에 안창호의 독립정신인 민족정신 고취와 민족성 개조 교육을 주안점으로 삼아 성실과 정직을 바탕으로 한 민족운동을 인도할 간부양성을 목표로 방향을 설정하고 일종의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을 택한 것 같다.[註23]

그들이 산업진흥을 위해 근대 산업시설을 구상한 끝에 민족기업의 모체적 성격을 표방하고 설립한 회사가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馬山洞磁器會社, 사장 이승훈)였다. 교육과 산업 다음은 책(冊)의 교육자적 구실과 직능을 높이 평가한 안창호의 견해에 따라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우고 안태국이 이를 맡아 경영하였으나 평양의 그것은 신민회원(新民會員)의 연락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소위 105인 사건 이후 폐쇄당하고 말았다. 신민회는 1909년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고 윤치호를 중앙위원장에, 최남선을 중앙총무에 위촉하여 안악(安岳) 등 9개 지역에 분회(分會)를 설치하였는데, 목적은 인격수양과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에 무실(務實) · 역행(力行) · 충의(忠義) · 용감(勇敢)을 4대 정신적 지표로 삼아 실행의 방향을 설정하였으나 1년 뒤인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해산당하는 비운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실행 취지와 목표는 그의 민족을 바탕으로 방향을 설정한 점진논적 민족실력양성운동의 목표에 따라 연면히 계승 유지되어 그 이후 1910년대 크게 성숙되었고 1930년대로 오면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운동으로 재현될 수 있을 정도로 저력적이었고 민중속에 깊은 신뢰와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가 온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신망이 있음은 이 같은 하나의 위업으로서도 족히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1)고종의 강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었다. → 순종 황제의 즉위(융희 연호 사용)
* 한일 신협약( 정미 7조약 1907) : 차관 정치 실시 → 통감이 내정 완전 장악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제4조한국 고등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용빙할 것.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2)의병 전쟁의 확산

의병 부대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 군을 편성하고 서울 진격전을 펴 나갔다.
* 군대 해산(1907년 8월) : 재정 곤란을 구실로 강제 해산
* 시위대 제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 → 시위대의 대 일본군 항전 → 원주, 진주의 진위대도 항전
* 해산된 군대의 의병 합류 => 정미 의병으로 분출 : 조직, 무기, 전투력의 강화
* 서울 진공 작전(1908)
→ 1만여명의 의병이 양주에 집결, 13도 창의군 편성(총대장 : 관동 의병장 이인영)
→ 선발대 허위 선생이 동대문 밖까지 진격 → 일군의 공격으로 실패
* 의병 세력의 약화 : 일본의 잔악한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 만주, 연해주로 이동
* 계승 : 항일 무장 독립군으로 이어짐



 

 




 

 

 





의병이 가지고 다니던 신표와 의병들의 모습이다.

 

 



군대해산 조칙

짐이 생각건대 국사 다간(多艱)한 때를 당하여 극히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지업(利用厚生之業)에 응용함이 금일의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성한 까닭으로 상하가 일치하여 국가를 완전히 방위하기에 충분치 아니할 새 짐은 지금부터 군제 쇄신을 꾀하여 사관 양성에 전력하고 나중에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함으로 짐이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택하고 기타는 일시 해대(解隊)케 하노라 …

1907년 7월 31일 (국사편찬위원회 편,『한국독립운동사』)

군대해산은 대한 제국 군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철두철미하게 비밀리에 행해졌다.조칙을 알리기 전에 1개여단의 일본군 사단을 급파하였고 6만여점의 무기를 일본으로부터 수송하여왔다.박승환의 자결을 알리는 통한의 총소리는 대한제국 군인들을 일군의 무장해제에 저항하는 일대 시가전이 벌어지게 하였지만 그 우수한 화력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해산된 군인들은 정미의병으로 합류하여 조직력,전투력,전술력을 제공하게 된다.

의병장 민종식이 의병들에게 알린 글

슬프도다. 이제 우리 나라는 일본에 강제로 삼켜졌으니, 나라 없이 자기 집과 자기 몸의 영예가 있을 수 없고 망국의 설움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 애달프다. 우리집 재신을 다 팔아서, 국나을 당하여 일어난 의병의 병기와 군량에 보충하리라.

 

 

 

 

 





13도 창의군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돌파구였다.그러나 차별적 신분관에 사로잡힌 양반 의병장들은 홍범도,신돌석 같은 의병장에게 중요 보직을 주지 않았으며 결국은 총대장인 이인영 선생이 부친상을 당하자 "불효를 하면서 충의를 다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총대장을 사임하고 3년상을 지내러 낙향해 버렸고, 허위장군이 이끄는 의병도 동대문 밖에서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와해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평양에서 체포된 의병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나라를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정신으로 충천해 있었다.

 





소위 남한 대토벌 작전이란 호남지역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하여 1909년 9월부터 11월까지 70여 일간 진행되었던 피비린내 나는 일군의 살육작전을 말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특히 부녀자만 있는 집들은 의병의 집이라고 하여 잔인한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역사 속에 의병장들의 이름은 남아 있다. 그러나 전국에서 수없이 죽어 간 이름 없는 의병들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오늘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런대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수많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민초들의 투젱 덕분인 것이다.옷깃을 여미며 우리가 살아 온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민족에 위기가 닥쳐 올 때 마다 떨치고 일어 난 선열들의 살아 숨쉬는 민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할 때 이들은 저승에서 나마 환히 웃으며 편히 잠드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당당하다.그들은 최선을 다하였다.비록 붙잡힌 몸이 되었지만 조국이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위 사진:체포된 채응언 의병장. 그는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아래 사진:체포된 호남지방의 의병장들. 그들 모두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여성의병 윤희순 ◑ 

 

 

 





1895년 의병장 유홍석(유인석의 사촌 아우)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 며느리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義兵歌)", "의병군가(義兵軍歌)", "병정가(兵丁歌)" 등을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해서 의병운동을 고취하고 부녀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친일파와 일본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죄상을 꾸짖엇다.

1907∼1908년의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에서 여자의병 30여명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서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1935년에 서거하였다.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안사람 의병가 ♣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 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리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국권을 회복하기 까지는 살아 돌아 오지 않겠다는 결의로 수많은 의병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로 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영국 기자 매켄지( Frederic Arthur Mckenzie)의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Korea's Fight for Freedom)



 



나는 그들이 휴대하고 있는 총을 살펴보았다.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나는 의병들의 조직을 물어 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사실상 아무런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들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순간 5, 6명의 의병들이 뜰로 들어섰다. 나이는 18세에서 26세 사이였고, 그 중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한 청년은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는 낡은 한복 차림이었다. 그 중 인솔자인 듯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이 최근에 전쟁을 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소. 일본군 4명을 사살했고, 우리측은 2명이 전사했고 3명이 부상을 입었소.

 

 


이상하군요. 두 배 이상의 전과를 올렸는데 왜 쫒겨 다니고 있습니까?

 




일본군은 무기가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정규군이오.. 우리 의병 2백명이 일본군 40명에게 공격 당해 패배한 적도 있을 정도요.



일본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소.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될 것이요. 그러나 어찌 되든 좋소!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오. 헌데 한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우리 의병들은 말할 수 없이 용감하지만 결정적으로 무기가 없소. 총은 낡아 쓸모가 없고 화약도 거의 떨어졌소. 당신은 원하면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기를 좀 사다 주시오. 돈은 5천 달러건 만 달러건 요구하는 대로 드리겠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종군기자로서 어느 한 쪽에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기자 윤리상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인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의병...후에는 독립군이 된 그들의 무기는?◑



 



이것은 의병들이 사용한 무기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였으나 무기가 부족하였다. 총은 낡았으며 그나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본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그들의 투쟁의지는 활화산같이 불타 올랐다.

매켄지가 본 의병은 18 - 26세?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더 어린 소년병도 있었다. 

 

 

이것은 의병들이 사용한 무기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였으나 무기가 부족하였다. 총은 낡았으며 그나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본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그들의 투쟁의지는 활화산같이 불타 올랐다.

매켄지가 본 의병은 18 - 26세?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더 어린 소년병도 있었다. 





 



◆내부에서 정부에 조회하되 현재 평안남북도 민인 등의 소장을 접한즉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민이 부역함은 당연한 바이라 누가 감히 응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민을 동원함에 때를 가림은 공자의 가르침이오 민에게 일을 시킴에 3일을 기한으로 한다 함은 예경에 나타난 바라.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본국은 개명한 나라라 하는데 삼남의 철도 공역에는 별다른 민폐가 없다더니 오직 우리 평안도 철도 공역에는 어찌 그와는 서로 다른가. 인부를 혹사하여 한시도 쉬는 일이 없고 하루의 공역에 반나절의 고가(雇價)도 지급하지 않으니 민이 어찌 기뻐하여 공역에 응할 것인가.

이럼으로 여러 군에 배정하여 억지로 인부를 끌어와 가가호호 염출하여 스스로 양식을 부역소로 가져오니 이것이 하루 이틀의 공역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민들이 어찌 감당할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성인의 가르침에 이르는 민을 동원함에 때를 가리는 것이며 민을 시킴에 3일을 기한으로 한다는 뜻에 합당하다 할 것인가.

… 또 일본인 일꾼들이 강변 각곳에 산재하여 소나무산을 억지로 팔게 하고 시가의 1/10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인부로 하여금 억지로 나무를 베어 운반해 각 시장에서 전매하여 모리행위를 함을 일삼으니 어찌하여 일본인은 모리를 하고 한국인은 강제 노역을 감당해야 하는가.

또 일본인 역부가 있는 곳 근처의 닭이나 야채도 위협하여 강제로 탈취함에 값을 달라 하면 도리어 협박함이 이를 데 없으니 불쌍한 우리 평안도 민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우리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이에 감히 소장을 올리니 통촉하신 후에 현재의 부역에 따른 폐단을 영원히 없도록 하기 바라며

… 몇 년 동안 외국인 병사들이 내왕함에 허다한 수응(酬應)이 이미 백성의 피폐함을 극에 이르게 한 바 지금 이 철도 부역에 고가(雇價)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무리함이 지극하거든 또한 나무를 베어 운반함에 아무 근거없이 사역하고 민들의 물자를 강제로 빼앗으니 민들의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는 심정이 말로 다할 수 없기에 …

-황성신문 1906년 3월 27일-


의병[義兵]


국가가 외침(外侵)으로 인해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민병(民兵).

[개요]

한말 제2차 의병투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외침을 많이 당하여 의병의 역사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및 한말의 항일의병이다(→ 한국사).

[삼국·고려 시대의 의병]

삼국시대에 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외항쟁에 참여한 것은 고구려의 대(對) 수·당 전쟁 때의 안시성 싸움 등이 대표적이고, 고려 때는 대몽골항쟁에서 농민·천민들이 항쟁의 주체로 활동했다.

특히 1231(고종 18)~32년 몽골의 1차 침입 때 노비·천민들이 중심이 되어 승리한 충주성방어전, 마산·관악산의 초적(草賊)들이 최씨정권과 제휴하여 항몽투쟁에 참여한 것,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金允侯)가 관노의 부적을 불사르고 소와 말을 나누어준 뒤 노비·천민의 속량 및 관직제수를 약속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70여 일 동안 충주성을 방어한 것 등은 그 시기 대표적인 의병의 사례이다(→ 몽골의 침략). 그러나 통치질서의 혼란으로 인한 일반 민들의 불안감과 대몽항쟁에 대한 집권층의 이율배반적인 시책, 민에 대한 계속적 수탈은 민과 정부 간의 결합을 와해시켜, 결국 민의 반봉건봉기를 촉발시켰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임진왜란 때의 의병항쟁지역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의 부산포 침략으로 개시된 전쟁에서 조선관군은 20여 일 만에 서울까지 함락당했다. 패퇴하는 관군을 대신하여 지방의 사림(士林) 가운데 명망있는 자들이 창의(倡義)하여 문하(門下)·종유인(從游人) 등의 호응을 얻은 다음, 그들이 다시 각기 노복(奴僕)이나 거주지의 향민(鄕民)들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조직되었다(→ 사림파). 의병이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던 것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한 학연(學緣)·지연(地緣)이 가장 크게 작용하면서 근왕정신(勤王精神)으로 무장된 사림유학자들과, 동족·향촌 방위의식으로 결속된 양인농민들과 노비 등이 '섬오랑캐'인 일본의 침략에 대한 격렬한 민족적 적개심으로 쉽게 결합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전쟁중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은 일본군이 제일 먼저 침입한 경상도로, 선봉장은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였다. 곽재우 의병은 조식(曺植)의 문인인 경상도의 북인(北人)들과 농민·하급관리·노비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승전을 거듭하여 의령·삼가(三嘉)·합천(陜川)·현풍(玄風) 등을 수복했고, '홍의장군'의 별칭을 얻었다. 역시 북인들인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의 김면(金沔) 등도 문인 및 향민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상우도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영천의 권응수(權應銖)는 관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영천을 수복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전라도는 백인걸(白仁傑)의 문인인 담양(潭陽)의 고경명(高敬命)·유팽로(柳彭老)·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을 조직하고, 그해 7월 금산(錦山)에서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부대와 처절한 격전을 벌여 고경명 이하 대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했으나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했다.

충청도에서는 서인인 조헌(趙憲)과 승려 영규(靈圭) 등이 부대를 조직하여 청주를 수복한 데 이어 8월 금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700여 명이 전사했으나, 호서지역에 침입했던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 등이 활약했고, 황해도에서는 전(前) 연안부사 이정암이 부대를 조직한 뒤 강화의 김천일(金千鎰) 부대 등과 연합하여 연안방어전투에서 승리했다. 평안도에서는 승려 휴정(休靜:서산대사)이 묘향산에서 전국각지의 승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고, 승병부대를 조직해 평양성 수복전투에 공을 세웠으며, 충청도의 영규, 강원도의 유정(惟政:사명대사), 전라도의 처영(處英) 등도 의승군을 조직하여 호응했다.

함경도에서는 북평사 정문부(鄭文孚) 등이 부대를 조직하여 경성·단천·길주를 수복했다. 그외에도 김덕령(金德齡)·최경회(崔慶會)·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변사정(邊士貞) 부대 등이 전국 각지에서 활약하여 1593년 1월 전국의 의병 수는 2만 2,600명에 달했다. 특히 당시 일본군은 중도·좌도·우도의 간선도로를 따라 급진격했기 때문에 후방에는 요지에만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들은 민들의 지지와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계속 일본군을 괴롭힐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정부가 군비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삼수미세(三手米稅)의 제정과 둔전경작을 통해 농민에 대한 징세를 강화하자, 의병으로 참전했던 많은 민들은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켰고, 마침내 의병모집을 명목으로 무장력을 확보한 송유진(宋儒眞)·이몽학(李夢鶴)의 난 등이 일어났다. 정부는 각 도의 의병을 통제하기 위해 김덕령을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의병부대들을 통솔하게 했으나,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김덕령을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 하여 옥사시키자, 정부에 대한 민들의 신뢰는 더욱 떨어졌다.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의 의병]

1627년(인조 5) 1월 후금(後金:뒤의 淸)의 침입으로 관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의주·곡성·안주·평양 등이 점령되자, 조선 정부는 공주로 피난함과 동시에 서둘러 화의를 모색했다. 그러나 의주·용천·철산·선천·곽산 등 청천강 이북지역에서 지역민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후금군에 대항했는데, 특히 용골산성의 정봉수(鄭鳳壽) 및 용천의 이립(李立) 부대가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호남 등 후방지역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한 곳에 집결시켜 전장에 나감으로써 관군의 무력함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어 1636년 12월 청(淸)이 대규모로 침입하여 관군들이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고 도주하자, 조선 정부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서둘러 피난함에 따라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반면 많은 민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남한산성과 강화도 방어전에 참전했으며, 평산의 이진형, 해주의 유즙, 평양의 조유부·김지구, 곽산의 홍천감·이여각 등의 의병부대들이 청군의 후방에서 계속적인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의 의병의 활동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의 전국적인 의병의 활동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그 주된 원인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 그리고 사회적 불안의 연속 등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일반 민의 신뢰감이 완전히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말의 의병전쟁]

한말의 의병항쟁지역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게 되자, 1894년부터 의병이 일어나 1907년에는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전쟁이란 원래 국가와 국가 간의 무력충돌을 의미하고 국가의 전쟁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이지만, 1907년 대한제국 정부는 국가의사를 결정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으므로 당시의 국가 및 국민의 의사는 의병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의병전쟁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는 것이다. 의병전쟁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무력항쟁을 말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일제와 싸운 것은 독립전쟁으로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에 전개된 의병전쟁은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되어 1918년까지 일제에 항전했다(→ 일제강점기).

의병전쟁의 주체와 전개양상의 특징별 시기를 구분하면, 첫째, 일제침략과 의병전쟁의 발단 시기(1894~1896. 10)의 전기 의병, 둘째, 일제의 반식민지적 강요와 의병전쟁의 전개기(1904~1907. 7)의 중기 의병, 셋째,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의병전쟁의 발전기(1907. 8~1909. 9)의 후기 의병, 넷째, 대한제국의 멸망과 독립군 작전기(1909. 11~1915. 7)의 전환기 의병, 다섯째, 일제식민통치하의 유격항전기(1915. 8~1918)의 말기 의병 등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기 의병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빌미로 침입한 일본군이 그해 6월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호위하던 군대를 무장해제하는 등의 횡포를 자행한 사건이 일어나자, 경상도 안동(安東)과 평안도 상원(祥元)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그들의 사상은 봉건적 충군(忠君)사상이었지만, 같은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갑오농민전쟁과 더불어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민족의지를 대변한 항쟁이었다.

그런데 당시 갑오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의병전쟁은 발전하지 못했다. 의병전쟁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발전했다(→ 을미의병). 즉 일본제국주의가 자기들의 간섭을 거부하던 중심인물인 명성왕후를 학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충청도 회덕(懷德)에서 문석봉(文錫鳳) 의병과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김이언(金利彦) 의병이 일어나고, 그외에도 전국에서 의병봉기를 준비했다.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왕후를 학살한 일제가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그 친일내각이 그해 11월 15일 단발령을 발포하자 의병이 전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이때 의병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주로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었다. 유생들은 비록 봉건적 한계가 있었지만, 갑오농민전쟁으로 고양된 반일의식이 민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때였으므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남한산성의 김하락(金河洛) 의병진을 비롯하여 춘천(春川)의 이소응(李昭應), 강릉(江陵)의 민용호(閔龍鎬),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제천(提川)의 유인석(柳麟錫), 진주(晉州)의 노응규(盧應奎) 의병진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896년 2월에 이르러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이어 단발령의 취소와 함께 의병들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자 대부분의 의병은 해산했다. 그러나 유인석·민용호·김도현(金道鉉) 등의 부대는 일본에 이어 러시아의 정치간섭에 항거하여 해산을 거부하며 항전했다. 그해 10월 15일 김도현 의병진의 해산으로 전기 의병전쟁은 끝났으나, 그때 유인석과 민용호 의병진은 해산을 거부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중기 의병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일제가 대외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고 그들의 군용지를 강점하는 등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침략을 본격화한 데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에서 비롯된다(→ 을사의병). 한일의정서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는데 이러한 침략에 대하여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의 농민이었다.

당시의 농민은 전기의병이 해산한 후, 영학당(英學黨)·남학당(南學黨)·활빈당(活貧黨) 등의 농민운동조직을 일으켜 반봉건적 항쟁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의 다양하고 다원적인 농민조직에 의한 반봉건운동을 광무(光武) 농민운동이라고도 하지만, 그러한 반봉건적 농민운동조직이 한일의정서의 강제체결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을 맞아 반제국주의적 항쟁으로 전환하고 활빈당 등의 농민운동조직을 의병조직으로 개편하여 일제침략에 항전했다.

일제가 1905년에 일제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요하다가 고종이 끝내 비준을 거부하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빼앗고 내정을 간섭하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다. 이에 전기 의병을 주도하던 유생들이 다시 일어났고, 뜻있는 관료들도 벼슬을 버리고 의병전선에 합류하였다.

따라서 중기 의병은 농민·유생·관료 등이 힘을 모아 의병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기 의병에 비하여 주체역량의 성장을 보였고, 그 이념도 전기의병 때의 충군의식이나 척사의식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식이 고양된 발전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 홍주(洪州)의 민종식(閔宗植), 영천(永川)의 정환직(鄭煥直), 태인의 최익현(崔益鉉) 진영이 대표적 의병부대였다.

후기 의병은 중기 의병의 연속선상에서 전개되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전해지고, 을사조약의 비준을 거부하던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쫓겨나고 순종이 즉위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丁未七條約)이 강제 체결되어 을사조약을 추인한 뒤에 일제 통감부의 감독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8월 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을 후기 의병이라고 한다(→ 정미의병). 중기 의병을 주도한 농민·유생과 양심적 관료는 물론 소상인이나 해산군인이 의병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은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해산군인의 참전으로 전술면에서도 크게 발전했다. 신돌석·김수민(金秀敏)·안규홍(安圭洪) 등은 농민의병진을 이끌고, 허위(許蔿)·이강년(李康年)·고광순(高光洵) 등은 유생·관료 출신을 이끌었으며, 민긍호(閔肯鎬)·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 등은 해산군인으로 의병전쟁을 이끌었다.

이들은 1907년 12월에 양주(楊州)에서 연합의병 진영으로 13도창의대를 결성하여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단행했다. 서울진공작전은 허위·김규식·연기우 의병진이 주도했는데,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12㎞) 격전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후에도 그해 5월까지 서울의 북방 임진강에 거점을 두고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1908년 5월에 이르면 의병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던 허위·이강년·민긍호·신돌석 등이 전사하거나 잡혀 순국하고, 그후부터 의병진은 주로 평민의병장이 이끌고 항전했다. 이때 의병전쟁은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의 지방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의병장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홍범도(洪範圖)였으며, 그외에도 유인석·이범윤(李範允)·안중근(安重根) 등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망명하여 크라스노키[烟秋]를 근거지로 국내진격작전을 수행하다가, 1909년 3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哈爾賓]으로 출동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연해주 의병은 1910년 봄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활약하면서 독립군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국내의 의병은 추가령지구대(秋哥嶺地溝帶)·태백산(太白山)·지리산(智異山) 등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소수 부대의 유격전으로 항전했는데, 이때에 호남지방에서 폭넓은 항전이 전개되었다. 전기 의병과 중기 의병 때는 다른 지역보다 뒤늦게 봉기한 호남지방의 의병이었으나, 후기 의병에서는 특히 1908년 여름 이후에 호남 전역에 걸쳐 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0년에는 전국 교전 회수의 47%가 호남에서 전개될 정도로 격렬한 항전을 보였다.

그것은 이 지방에 일본인 농장이 많이 침투한 데 대한 농민의 저항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909년 9, 10월에 걸쳐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이때에 안규홍·기삼연(奇參衍)·심남일(沈南一)·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임창모(任昌模) 의병장 등이 격렬하게 항전했으며, 이후 의병전쟁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전쟁은 전기·중기 의병 때와는 달리 국민전쟁의 양상을 띠었고 그에 따라 평민의병진이 발달했으며, 1908년 5월 이후에는 소규모의 유격작전으로 항전하는 게릴라전이 확산되어갔다. 전기 의병과 중기 의병은 관군과도 싸웠으나 군대가 해산된 후기 의병부터는 일본군과의 싸움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침략 속에서 안주하는 부호나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일본군 앞잡이에 대한 응징 공격도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환기 의병은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이 감행된 이후인 1909년 11월부터 의병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해가던 때의 의병전쟁을 말한다.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진은 대부분 산악의 게릴라 부대로 활동했다. 의병진이 독립군으로 전환한 것은 이때에 비롯된 것은 아니다.

즉 1907년 12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전개된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후 유인석·안중근 등이 연해주로 망명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폈듯이, 해외독립군으로의 전환은 1908년 여름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1909년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장에는 홍범도·이진용(李鎭龍)·박장호(朴長浩)·전덕원(全德元) 등이 있다.

의병이 해외독립군으로 전환할 때 국내에서 항전을 계속한 채응언(蔡應彦)·강기동(姜基東)·연기우 등의 의병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 8월 이후에도 강경하게 항전하여 일제식민통치를 교란시켰다. 1914년에는 옥구(沃溝)의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하여 종래의 유림의병을 광범하게 규합해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했고, 이어 문경(聞慶)을 중심으로 민단조합(民團組合)이 결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환기 의병은 1915년 7월 채응언 의병진이 파괴당하면서 끝났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每日新報〉를 보면 국내에서 무수한 의병의 항전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기 의병은 1915년 8월 이후 종래의 의병이 이합·집산하면서 매우 부정기적으로 전개한 항전을 가리키는데, 그 사례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3·1운동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헌병대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친일관리나 부호를 습격하기도 하면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했다.

학자에 따라서 말기 의병은 의병전쟁과 별도로 일제에 항거한 무장폭도 등으로 이해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새로운 폭동과는 달리 종래 의병항쟁의 연속현상의 경우가 많았다. 의병이 1910년대에 해외로 망명하거나 계속 항전하다가 순국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밖에 글방선생·머슴·술장사·엿장사 등으로 은신해 있다가 3·1운동 때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시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의병전쟁은 1894년 전기 의병부터 1918년 말기 의병에 이르기까지 주관적·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이 5단계로 변천했다. 이때 민족운동이 의병전쟁으로 전개된 한편에서는 계몽운동이 전개되어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양립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계몽운동을 추진한 주체는 신지식을 수용한 유산자들로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성격을 띠었다. 의병전쟁의 주체자는 전기 의병에서는 유생층이었으므로 봉건계급이었다.

이러한 봉건계급에 농민들이 합세한 것은 반제국주의 의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기 의병은 유생이 주도했지만 중기 의병부터는 신돌석의 의병진처럼 농민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후기 의병에서는 국민전쟁으로 전개되어 1908년 5월 이후에는 평민의병이 의병전쟁을 주도해나갔다. 여기에서 의병전쟁이 민중화되어갔음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의병전선은 반봉건적·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나타냈다.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양립하여 전개되던 민족운동은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면서 합류해갔다. 계몽운동이 의병전쟁의 무장투쟁방략으로 수정해간 것이다. 그리하여 독립전쟁론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전쟁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미연에 막지는 못했으나, 독립군으로 발전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의병전쟁 가운데 가장 격렬했던 시기인 1906~11년에 일본군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일본군의 사상자가 403명, 의병 사상자 2만 1,485명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민간인 사상자가 제외되어 있으므로 인명손상의 실태를 알 수 없다.

일본군은 1907년부터 초토작전을 전개했다. 유인석·정환식·고광순·연기우 등 의병장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까지 학살한 일, 민긍호 의병장이 머물고 간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를 모두 불태운 일, 진성 이씨 문중에 의병이 많다고 해서 그의 종가인 퇴계(退溪) 형제의 고택을 태워버린 사례 등은 모두 잔인한 초토작전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의 통계를 따른다고 해도 1907년 7월부터 1908년 까지 6,681호를 소각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의병전쟁으로 인명손실이나 물질적 피해는 매우 컸으나, 그후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새로운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제목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 교훈삼아야 (jbg1219) 2015.01.17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 교훈삼아야
항일독립투사, 중형을 언도받은 수형자 ,모진 박해와 강제노역으로 옥사
동영상 첨부
http://www.youtube.com/watch?v=g6gEv0Ug4gk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 건립해야

애국선열의 민족과 나라위해 걱정하는 호령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정한 민족독립의 성지,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이다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찾아 38년 고군분투 (jbg1219) 2015.01.17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찾아 38년 고군분투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 찾아 36년 고군분투 정용선(鄭溶璿, 1883년 ~ 1928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xSxb0IcQq1U
KBS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www.youtube.com
日 극우파 못들어오게 한다… 정부, 입국 3명 공항서 강제송환 201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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