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연해주 연추 의병부대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6.30 조회: 2653
1) 연추 의병부대

  연해주는 간도와 더불어 한국 영세농민의 오랜 국외 이민지였다. 1860년 이후는 이민자의 수가 급증하여 1910년까지 10 만여에 달하는 한인사회(韓人社會)가 형성되었다. 특히 노일전쟁 이후 더욱 가열해지는 일제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모여든 망명항일투사(亡命抗日鬪 士)들의 호수(湖水)와 같은 국외(國外) 구국운동근거지(救國運動根據地)가 되어 갔다.
  

  1906년 초 이범윤이 충의대(忠義隊)(사포대(私砲隊)·관리병(管理兵))를 이끌고 도착한 연추(煙秋)지역은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톡) 등지와 같이 이주 한인(韓人)들은 노국에 귀화했거나(원호(元戶), 원호(原戶)) 귀화하지 않았거나(여호( 餘戶), 유호(流戶))간에 조국의 위기 상황을 전해 듣고 자신들의 권익 보호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식이 팽배하여 갔다.
  

  연추에는 원호로서 거부가 되어 노국황제로부터 연추도헌(都憲)이라는 관직과 두차례나 공로훈장까지 받은 한인사회의 대표적 유지인 최재(崔在)(재(才))형(亨)이 있었다. 이범윤은 최도헌이 설립한 한인중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기의(起義)할 때는 그의 후원을 받았으며 또한 공동으로 연추의병을 조직하고 항일구국(抗日救國)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파기운동 후 망명(亡命)을 단행, 상해(上海)·해삼위를 거쳐 연추(煙秋)를 방문한 이상설(李相卨)과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그 만남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지움의 양자(兩者)는 의병전략과 계몽전략의 서로 다른 방략(方略)의 구국운동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이후부터 1910년 국망(國亡) 전후에 연해주지역으로 집결한 구국운동의 지도층은 그 계통이 다양하였다. 이범윤을 필두로 유인석(柳麟錫)·우병렬(禹炳烈)·이진룡(李鎭龍)·안중근(安重根) 등 의병계열과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위종(李偉鍾)을 필두로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의 간도민족주의(間島民族主義) 교육자,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전명운(田明雲)·이성무(李成茂) 등 미주(美州) 공립협회(共立協會)(국민회(國民會))회원, 안창호(安昌浩)·이종호(李鍾浩)·이갑(李甲)·조성환(趙成煥)·유동열(柳東說) 등 국내 신민회 등등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여러 길로 나뉘어 연해주로 건너 왔던 것이다. 그리고 전기· 중기의병 및 해산군인충도 일부 북상도강하여 연해주로 망명하여 왔다.
  

  또한 연해주는 제정노국의 극동진출의 군사기지로 일제 북진세력과 맞선곳으로 약 3만 9천 명의 육해군이 주둔한 곳이다. 한편 일본군은 한국주차군 1개사단을 북한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일전쟁 후 양국은 만주의 이권을 양분하고 되도록 국제적 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던 때이므로 한국의 항일무장부대의 존재는 노국측에서는 사실상 귀찮은 문제였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의병을 소집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시켜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해주 특히 연추지역은 간도나 국내 어느 곳보다도 항일무장의병전쟁 수행에 유리한 곳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노일전쟁에 참전하였던 노국군인들은 패전 후 상당수가 현직에서 파면 또는 해산되어 연추 등의 남(南)우수리 지역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들이 한인들의 항일무장의병(抗日武裝義兵)운동을 후원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1

  

  2) 무기·군자금의 조달

  

  이범윤 등 노령 연해주지역 의병들의 대표적 기지는 연추(노보키에프스크)였다. 연추를 기지로 한 연추의병부대의 결성과 발전은 전술한 바 연추 토착 유력인사인 최재형의 적극적 지원으로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두 인물은 무장항일전을 표방하던 의병노선(義兵路線)의 양대축(兩大軸)을 형성하는 대표적 의병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범윤이 지휘하던 의병부대의 편성토대는 충의대(忠義隊) 병사 700여명으로 하였다. 특히 이범윤은 최재형의 후원으로 직접 연해주 각지를 순회하여 그 곳 한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의병의 소모와 군자금을 모금할 수 있었다. 이 때에도 북간도에서 사용하였던 마패(馬牌)(관인(官印))와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직함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최재형은 이들 의병들에게 의복·식량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모금한 자금이 30만원에 달했고 의병수도 3, 4천명으로 중원되었다. 특히, 노국지방 당국자들은 항일의병운동이 노국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한 '공식지원'도 '금지'도 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노국인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상존함을 반영한 것이며 특히 제대병들의 의병에 대한 동정심은 대단했다. 비록 이범윤이 이들 노국 제대군인들을 의병부대로 끌어들이는데는 실패하였으나 이들로부터 다량의 우수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연해주에서는 마적(馬賊)습격에 대비하여 총기의 민간인 소유를 공인하고 있었으며 총기·탄약의 매매도 원래 허가제였으나 연추에서는 사실상 자유로이 매매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범윤의 의병부대의 무기와 장비는 패전 노국군인들로부터 저가로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거나 혹은 한인 사회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기의 주종은 노국제 5연발, 14연발 총으로서 국내 의병에 비해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의병의 복장은 대체로 노국식의 카키군복을 착용하고 겨울에는 털모자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일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노국군의 폐총 불하(拂下)를 교섭하는 한편 훈춘의 청국 당국자에게도 무기공급을 교섭하였으나 일본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양국(兩國)은 이러한 이범윤의 무기제공요구를 거절하였다. 1907년 수청군에서만 1만 루블이 모금되었으며, 1908년 전(前) 주로공사(駐露公悽) 이범진(李範珍)은 3만원을 이범윤에게, 그 아들 이위종(李偉鐘)은 1천원을 동의회(同義會)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로부터 군자금이 조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1907년 여름, 이범윤은 광무황제(光武皇帝)로부터 의병활동의 전권(全權)과 군자금을 얻어내기 위하여 두 부하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주한노국총령사(駐韓露國總領事)에게 황제의 알현과 청원서의 전달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노국 총영사의 거절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가 루스코-키타이스키은행 해삼위 지점에 이용익(李容翊) 전(前) 재무대신 명의로 일본돈 30만엔(당시 시가로 쌀 10만석에 해당)을 예치했던 사실을 입증하는 비밀문서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고종황제가 비밀리 독립군에게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돈을 빼앗을 우려가 있다'고 적혀 있어 이 돈이 연해주 의병군 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1908년 9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 경성지부(鏡城支部)에서 수집한 군자금 1만7천원을 연추 이범윤 앞으로 우송한 일이 있었다.  1910년 전후하여 이범윤이 연추 사무소에 함흥일대 부호명부를 비치해 놓고 군자금을 수집하거나 강원도 통천(通川)에는 격문을 띄워 그 곳 유력자들과 합세·군자금을 모집, 연해주로 우송할 계획도 하였다.

 그밖에 간도지역 의병장들도 휘하의 인물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조달, 연추 의병사무소인 창의소(倡義所)로 송금케 하였다. 특히 유인석은 그의 문인(門人) 박치익(朴治翼)을 통해 군자금을 전달하였으니 그 관련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때 이범윤(李範允)과 최재형(崔才亨)이 의병을 규합하여 본국으로 출병하여 왜적을 벌하고자 하였다. 박치익(朴治翼)은 선생의 명(命)을 받아 군자(軍資)를 보내었다.

  3) 연추의병부대의 조직

  1908년 초 이범윤과 최재형은 연합하여 3, 4천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으고 연추(煙秋)를 의병기지로 '연추의병부대(煙秋義兵部隊)'를 조직하였다. 광활한 연해주에는 한인 밀집지역이 원거리에 각기 분포되어 있으므로 의병들도 분산 편제되어 있었고 뿐만아니라 여러 단위부대가 이합집산(離合集散)되는 복잡한 구조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의병지도자들의 성향도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연추(煙秋)를 중심으로 시종일관 의병활동을 한 이범윤 지휘의 의병부대를 '연추의병부대(煙秋義兵部隊)'로 지칭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되어 본고는 이 부대 중심의 의병활동을 고구(考究)코자 하는 것이다.
  

    이범윤은 연해주 한인교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포고하여 의병소모에 나섰다.

  광무황제(光武皇帝)는 나를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로 임명(任命)하셨기에 나는 불라디보스특 총독(總督)과 연락하여 조국(祖國)의 독립(獨立)을 달성하기 위한 한인협회(韓人協會)를 창립하였다. 연해주(沿海州) 거주(居住)의 모든 우리 형제(兄弟)들이 잠을 자고 있고, 우리의 형제들은 모두다 조선출신(朝鮮出身)들이다. 이역(異域)에서 우환(憂患)없이 살고 있지만 고국(故國)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나는 조선인(朝鮮人) 홍범도를 의병장(義兵長)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총기(銃器)·금전(金錢) 등을 모으기를 명령한다. 연해주(沿海州) 동포(同胞)여, 합심(合心)하여 우리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자. 구국(救國)의 사업(事業)에 특별한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들은 조선(朝鮮)으로의 귀국(歸國) 후(後)에 후한 상(賞)을 얻을 것이다.

  연추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결사의 성격을 지닌 동의회(同義會)와 창의회(彰義會)가 결성되어 연추의병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동의회(同義會)는 1908년 5월경 최재형이 이주한인간의 단결도모와 환란구제를 표방하면서 결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항일의병결사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 취지서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만약 조국이 멸망하고 형제가 없어지면 우리는 뿌리없는 부평이라 다시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그러하면 우리는 어찌하여야 우리 조국을 붙들고 동포를 건지겠는가 금일 시대 첫째 교육을 받아 조국정신을 배양하고 지식을 밝히며 실력을 길러 단체를 맺고 일심동맹하는 것이 제일 방침이라 할지라 그런고로 우리는 한 단체를 조직하고 동의회라 이름함을 발기하노니. 
  

 슬프다 우리 동지동포는 아무쪼록 우리 사정을 생각하고 단체일심이 되어 소년 이태리의 혈성으로 조국의 정신을 뇌수에 깊이 넣고 교육을 발달하여 후진을 개도하며 국권을 회복하도록 진심갈력할지오다. 저 독국(獨國-주) 비스마르크는 평생에 쇠와 피와 두 가지로써 독국을 흥복하고 부강을 이루었나니 우리도 개개히 그와 같이 철환을 피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제군이여

  민족운동자들간의 결속과 이주한인들의 조국 구국정신의 배양을 역설, 곧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여 조국의 국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동의회는 의병결사 그 자체는 아니었으나 이범윤 등 그 중심인물이 항일의병을 다분히 지향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초기 임원은 다음과 같다.

동의회 임원진
 
총 장 : 최재형
부총장 : 이범윤(1909년말 배제됨)
회 장 : 이위종
부회장 : 엄인섭(嚴仁燮)
평의원 : 안중근·엄인섭
위 원 : 백규삼(白圭三) ·이경화(李京化) ·김기룡(金基龍) ·강창평(姜昌平) ·최천오(崔天五) (이상 의병), 함동철(咸東哲) ·정순만(鄭淳萬) ·전명운(田明雲)·이홍기(李鴻基) ·김용환(金龍煥) ·한경현(韓景鉉) 등 총 2-3십여명
회원총수 : 2-3천여명

  

  창의회(彰義會)는 이범윤이 조직·운영한 항일결사였다. 창의회의 조직시기는 현재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으나 일제 기록에는 '동의회(同義會)가 일시 해산 했을 때 이범윤이 새로이 조직한 것'이라고 하였고, 1908년 7월 국내 진공작전에 '창의회' 소속 의병들이 참여 하였다는 기록 이 있음을 보아 1908년 5월 동의회 조직 직후로 비정된다. 창의회는 동의회보다는 의병결사의 성격이 구체화 된 조직이었다.

 

  연추에 중앙본부인 사무소 혹은 시무소(視務所)를 두었는데 '창의대(彰義隊) 총영소(總營所)' 혹은 '창의소(倡義所)' 등으로 불려졌 다. 창의소에서 의병 소모, 군자금 모집, 군장비 조달 등 의병 사무에 관한 일체사무를 관장하였다고 판단된다. 현재 밝혀진 창의회 임원은 다음과 같다.

창의회 임원진
 
도대장(都大將) : 이범윤
총무장(總務長) : 이승호(李昇鎬), 홍범도(洪範圖)(1909년 말)
주 기(主 記) : ?
통 역(通 譯) : ?
의 병 : 박태암(朴泰菴) ·강윤혁(姜允赫) ·김정익(金正益) ·이병순(李秉純) ·이범린(李範麟) ·이우종(李祐鍾)·최도원(崔道元) ·장봉한(長鳳翰)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起龍) ·안중근(安重根) 등

  

  1908년 여름에 이범윤은 최재형과 더불어 위의 동의회와 창의회를 배경으로 연추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특히 이범윤은 해삼위에 있을 때 안중근(安重根)으로부터 '성패이둔(成敗利鈍)을 헤아리지 말고 당장 의혈청년을 모집하고 국내로 진격하여 겨레의 사기를 북돋우자'라는 기의(起義)의 제창을 받은 바도 있었다. 3, 4천명의 대부대는 연추를 근거지로 창의소(倡義所)를 두고 주변 3백여 마을에 분산 합숙시켰으며 군사훈련을 단행,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만주와 노령의 국경지점에 위치한 허센마꺼우(합십마구(哈什 溝))를 전초기지로 하였다.
  

    연추의병부대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연추의병부대 징용
 
총 독 : 이범윤
총대장 : 김두성(金斗星)(유인석(柳麟錫))
대 장 : 전제덕(全濟德) ·김영선(金永先) ·김모(金某)
좌령장(左領將) : 엄인섭(嚴仁燮)
우령장(右領將) : 안중근(安重根)(참모중장(參謀中將))
영 장(領 將) : 백규삼(白圭三) ·이경화(李京化) ·김기룡(金起龍) ·강창두(姜昌斗) ·최천오(崔天五) ·장풍한(張風翰)
총병사

: 약 1천명

    자료정리.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 강석현

제목
구 소련 거주고려인 합법체류 및 정착지원 특별법제정 2010.06.30
연해주 연추의병부대 국내진공작전 2010.06.30
연해주 연추 의병부대 2010.06.30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이야기 2010.06.30
[동영상특강]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5. 2010.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