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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 행위는 법적시효가 없습니다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7.13 조회: 1698

민족을 배반한 대가로 축적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추적해 민족 앞에 되돌려놓기 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12일로 4년간의 역사적 활동을 마감했다.

2005년 12월 공포된 특별법에 따라 2006년 7월13일 출범한 이래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의 땅 2475필지(1306만9403㎡), 시가 2373억원의 친일재산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1949년 친일파의 맹렬한 공작으로 반민특위가 별다른 성과 없이 와해된 지 61년 만이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전체 재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규모일지라도 실질적인 환수조처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는 진리를, 부당한 부귀영화는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는 영원한 오명의 누추한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원회를 이끈 김창국 위원장은 “민족을 배반한 역사적 과오는 아무리 오랜 것이라도 시대를 초월하여 분명히 바로잡히고 만다는 역사적 교훈을 후대와 세계사에 남겼다”고 위원회 활동을 평가했다.

김 위원장을 위원회가 있는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으로 찾아가 만났다. 고희를 맞은 나이임에도 얼굴선이 미소년처럼 고왔다. 검찰 간부 출신의 날카로운 인권투사를 예상했지만, 문기 어린 선한 법률가의 모순 같은 이미지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친일파 처단에 실패한 후 처음으로 구성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가 4년간의 활동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4년의 시간이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었고 인원이나 예산도 풍부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대로 가닥을 잡고 열심히 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합니다.

큰 무리 없이 역사적인 소임을 마무리하게 돼서 개인적으로도 기쁩니다. 다만 이런 친일청산 작업이 좀더 일찍 이뤄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여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환수한 땅이 여의도 면적의 1.5배 정도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체 친일재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시각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애초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정한 조사대상자가 총 507명인데 이 중 이번에 조사를 거쳐 재산을 환수한 사람은 168명에 그쳤습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조사대상 재산이 후손들이나 상속자에 의해 이미 처분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근거 자료가 소실돼 찾을 수 없는 경우, 북한에 본적을 둬 후손을 추적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금은보화나 골동품 같은 동산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건 수사권이 없어 추적할 수 없었지요.

특정 조사대상자에게 고서화가 많다는 제보가 있었지만, 수사권이 없는 터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목록을 받아다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조사대상 507명 중 168명만 토지환수 고서화·골동품 등 수사권 없어 손못대 “교과서 실려 후손들 가치관 바로잡길”

-가장 많이 환수한 친일인사는 어떤 인물들이었나요?

“이해승이라고 하는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194필지(시가 320억원)를 환수결정했습니다.

구한말 민씨 일족으로 일제시대 조선인 최고 부자였던 민영휘의 땅 51필지(시가 73억원)도 이번에 찾아냈습니다. 고종황제의 사촌동생 아들인 이달용의 땅도 환수 대상이 됐습니다.”

-환수 결정에 불복한 경우도 많지요?

“환수 결정을 받은 조사대상자 후손 또는 상속자의 70% 이상이 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선 자신의 할아버지 등 조상이 결코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결코 자발적으로 친일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일부 인사는 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주장도 합니다.

이분들은 재산도 재산이지만 친일파란 역사적 오명을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다음은 친일활동으로 재산을 축적한 게 아니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이라거나 친일활동과 무관하게 모은 재산이라고 하는 주장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원회 명의로 우편물이 오는 걸 매우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우편물 때문에 주위사람들도 알게 됐다는 거죠.”

-위원회 활동이 끝나도 소송은 계속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소송이 제기된 게 73건(행정소송 확정 21건, 진행중 52건)이고 앞으로 제기될 것도 있을 겁니다. 소송은 법무부가 맡아서 할 예정입니다.”

-특별법에는 위원회 활동을 2년 연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던데, 연장할 계획은 없었습니까?

“이명박 정부 출범을 준비한 인수위원회 시절에 이미 전 정부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는 활동 시한 연장이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그 이후 공식 논의된 적은 없지만, 저는 활동 시한이 연장될 가능성은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주어진 4년 기한 안에 최대한 활동을 잘 마무리하자고 했습니다.”

-4년간의 역사적인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말씀을 남기고 싶습니까?

“일부에서는 옛날 일을 들추어 사회통합을 해친다고 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범죄행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단죄되어야 합니다.

민형사상에는 법률 시효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범죄행위에는 시효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로잡을 것은 반드시 바로잡는다는 엄중한 역사인식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반민특위가 일년도 못 돼 와해되고 그것도 모자라 친일파들이 득세한 것이 우리 현대사이고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가치관의 혼란이 있었습니까? 이번 위원회 활동이 역사교과서에도 실려서 후손들이 제대로 된 가치관과 역사의식을 배우고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위원장님은 과거 초대 국가인권위원장(2001~2004) 시절 국회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한 바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국가보안법의 존재가 오히려 당연시되는 분위기이기는 합니다만.

“국가보안법 폐지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953년 5월 애초 형법 제정에 관여했던 당시 김병로 대법원장이 국회에 나와 ‘국가보안법 주요 내용 대부분이 새 형법에 담겼으므로 국보법은 폐지해도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방에서는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시기인데도 말입니다. 그때 어느 의원 한 분이 ‘지금은 전시이니 유명무실한 대로 그냥 두는 것도 무방하지 않으냐’고 해서 그만 국가보안법 존치 쪽으로 논의가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어차피 유명무실한 법이라면 굳이 폐지할 것이 있느냐고 하는 분들과 같은 논리이지요.

하지만 저는 변호사를 하면서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악용되고 얼마나 인권탄압 무기로 쓰였는지 수없이 보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존치 당시 국회 본회의 사회를 본 사람이 나중에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조봉암 부의장이었습니다.

법사위원장이던 윤길중씨도 국가보안법에 걸려 옥고를 치렀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엔 너무 비극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해선 어떤 견해이십니까? 최근 흉악범죄가 잇따라 발생하자 법무부에서는 사형집행 부활을 암시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를 지향한다면 세계적 추세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사형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저 역시 사형제도 존속에 반대합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형집행을 부활한다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크게 추락할 겁니다. 다만, 사형제 존속을 바라는 여론도 아직은 무시할 수 없이 큰 만큼 제도를 유지하면서 실제 집행은 하지 않는 현재의 방식은 나름대로 현명한 스탠스라고 봅니다.

최근에 법무부가 청송에 사형장을 만들 듯이 했는데, 잘못된 방향입니다. 종국적으로는 폐지가 세계적 추세인 만큼,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정책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인권은 정부의 최우석적인 책무입니다. 바람직한 인권정책에 대해서도 조언한다면?

“국민의 기본적 자유권은 어느 정도 확보된 만큼, 교육·노동·환경 등에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권 확보 차원의 인권정책을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자기방어에 불리한 계층을 사회가 제도적으로 먼저 배려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사람 가운데 부장검사 출신은 위원장님 한분이었습니다. 인권운동에 투신한 계기는?

“검찰에서 억지로 밀려난 뒤 개업 변호사 일에만 전념했는데 어느날 대학 1년 선배인 고 황인철 변호사가 제 옷자락을 잡아끌더군요.

그래서 민변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 젊은 변호사가 조용히 묻습디다. 부장검사까지 하신 분이 왜 민변 활동을 하십니까?라구요. 저는 그 질문의 의미를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나중에 보니 인권변호사 중 검사 출신은 제가 유일하더군요.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이런 정도였구나 하는 것을 뼈아프게 실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군부 일괄사표로 부장검사서 ‘해직’ 민변 창립 산파역…인권위원장 역임 “지금 인권위 위상, 할말 많습니다만…”

-81년 광주지검 부장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났는데 정치상황과 관계가 있나요?

“5·18 광주항쟁 직후 광주지검에 부임했습니다. 어느날 변사사건 결재가 올라왔는데 왼쪽 젖가슴이 대검에 찔려 죽은 여고생 사진이었습니다.

그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법무부에서 전국 검사 일괄사표를 받았어요. 신군부의 검찰 숙정의 일환이었는데 제 사표는 돌려주지 않더군요.”

-말하자면 졸지에 ‘해직 검사’가 되셨는데, 나중에라도 이유는 들어보셨나요?

“특별한 설명은 없었어요. (…) 이 위원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그냥 거기까지만 하죠.”

-갑작스런 변호사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그만둔 게 안돼 보였던지 법원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었어요. 형사단독 7개, 합의부 3개 등 10개 재판부에 모두 사건이 있던 적도 있고, 하루에 재판이 10건씩 있던 날도 있었습니다. 속된 말로 전관예우 잘 받았지요.”

-돈 많이 버셨겠네요?

“벌려고 들었다면 빌딩 몇채도 지을 만큼이겠지만, 저는 그런 재주는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때 치부 쪽으로 나섰으면 길이 많이 달라졌겠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던 차에 황인철 변호사가 나타난 거죠.”

-저는 기자로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논쟁이 대단했었습니다. 대필이냐 아니냐….

“재작년 법대 입학 50주년을 맞아 동기생 문집을 냈는데 저는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법조인 생활 통틀어 가장 인상에 남는 사건이었다고.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가슴 저 밑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의 앙금이 다시금 치밀어오른다고. 그 사건은 한마디로 엉터리고 검찰의 조작입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제가 검찰 고위간부 한 분을 만나 검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바로잡자고 했습니다.

그분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건 안 되겠는데’ 하더라구요. 검찰 생리상 과오를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걸 잘 압니다만…. 어쨌든 현재 법원에 재심이 청구돼 있는데 지금이라도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그때 강기훈씨 여동생이 여고생이었는데 지금 변호사가 되어 인권위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당시 오빠가 범죄자로 몰리는 데 큰 충격과 슬픔을 겪으면서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국가인권위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위상과 역할이 많이 위축된 것 같습니다.

“인권위원장 재직 때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이라크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 쪽에서도 놀랐겠지만, 그때 회의에 참석한 많은 나라의 인권관계자들이 우리 인권위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지금 인권위의 위상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겠지요.”

-이제 공직을 떠나시는데, 새로운 구상이라도 있으신지요?

“회고록을 쓰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회고록은 사회적으로 큰 기여를 하거나, 학문적 업적을 쌓은 사람이라야 하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운 좋은 것 말고는 별로 내세울 게 없다고 말입니다.

시험 빨리 붙고, 변호사협회 회장에다 두번의 장관급 직책까지 능력에 비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을 뿐입니다.

거창한 회고록은 가당치 않습니다만, 다만 손자·증손자들에게 할애비의 살아온 자취를 알리는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20년 이상 인권운동에 기여해온 원로신데 사회적 현안을 지니치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먼저 손들고 나설 일은 없겠지만, 제 역할이 필요하고 제 힘이 필요한 데가 있으면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오히려 제가 고마울 따름이지요.”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자료정리.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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