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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우파 지도자 우사 김규식박사 2.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7.14 조회: 2554

제11장 통일연합전선운동의 주도

  김규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4년 4월경이다. 그 동안 그는 옳다고 생각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으나 결국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한동안 자신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김규식이 상해로 돌아와 의기소침해서 낙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그를 포섭하기 위하여 “만일 이 때에 적당한 수단을 강구한다면 김규식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문화적 시설을 옹호하는 자가 될 것은 반드시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학자형의 김규식을 나약한 지식인으로 보고 그를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김규식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김규식이 연약한 의지를 갖고 일신의 안녕을 추구했다면 아마도 많은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택한 데에는 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의한 한국독립당 조직을 구체화하고자 6월 7일 「한국독립당조직안」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운동은 모름지기 민중을 근저로 한 통일된 혁명적 노선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유력한 혁명적 중추로 유일한 민족적 혁명당의 형체를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들이 소련에서 쫓겨온 창조파 중심의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혁명당의 구상은 후일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무렵 김규식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교인 로녹대학으로부터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한인 학생들의 학력을 증진시켜주고 고등교육을 준비시켜주기 위한 과정인 중등교육 과정의 학교인 고등보습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학교는 1924년 9월 15일에 개교하였는데, 김규식은 교장으로서 학원을 운영하는 한편 영어교사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였다. 그의 셰익스피어 강의는 명강의로 유명하였다. 이 학원은 후일 임시정부 운영의 공립학교인 삼일중학으로 발전하여 상해의 유일한 한인 중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상해는 최신사조를 받아들여 변혁과 혁명이론을 연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한국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정치적 행동의 자유가 있음으로 해서 많은 한인학생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한인 유학생들은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중국 학생들과 연합하여 반제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상해의 유학생들은 상해유화학생회(上海留華學生會)를 조직하여 학업 외에 강습회·연설회·강연회·웅변대회 등 각종의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은 상해의 유학생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서 영향을 끼쳤고 유학생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현정세와 시사에 관한 연설을 하여 청년들에게 정확한 현실인식을 하도록 계몽하는 한편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교육활동 중에도 김규식은 항상 일제의 감시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특히 상해의 불란서(프랑스)조계 지역을 벗어나 일본의 통치력이 미치는 공동조계 지역에 위치한 복단대학으로 강의를 나갈 때면 김규식은 학교측과 상의하여 중국인으로서 변성명을 하고 강의에 임하였다. 그래서 당시 김규식은 김성(金成)·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왕개석(王介石) 등 여러 가지 성명으로 자신을 위장하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여러 번 일제 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잘 피하여 일경의 끈질긴 추격을 물리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규식은 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자신의 날카로운 필치를 잠시도 쉬지 않았다. 1925년 영자신문에 영국과 미국을 배척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중국학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연합(Union)』지 1927년 7월 5일자에서 중국에 있는 영국 세력하의 외국 언론들을 통렬히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한 바 있었다. 이에 영국·미국·일본이 공동 관장하는 공동조계 당국은 영장을 발급하여 김규식을 체포하고자 했고, 김규식을 과격파로 단정한 불란서(프랑스)조계 당국도 김규식의 체포에 대해 협조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와 불란서(프랑스)조계 당국은 그의 자택을 습격하였지만 이미 정보를 들은 김규식은 상해를 떠나 천진으로 이주하였다. 이후로 김규식의 활동무대는 상해에서 천진으로 옮겨졌다.
 

  김규식은 천진에 있는 북양대학(北洋大學) 교수로서 재직하였고, 대학 구내의 사택에서 지내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의 급진파 독립운동 세력과도 연결을 갖고 있었다. 김규식은 일찍이 중국인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단체를 구성할 필요를 느끼고 여운형·윤기섭·한진교 등의 한인과 중국인들과 함께 1921년 5월에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를 창설한 적이 있었다.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들려오자 중한국민호조사의 한·중(한국·중국)인들은 일본에게 1905년「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과 1910년의 「합방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취소하고 한국을 절대 독립시킬 것, 그리고 한국에서 정치상·경제상·군사상의 시설 일체를 철거할 것 등을 요구하는 제안과 선언을 공동으로 채택하였다. 김규식은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서 외교 활동 중인 한·중(한국·중국)인들에게 발송한 바 있었다. 이후 중화국민호조사는 1942년 10월 11일에 중경에서 창설된 중한문화협회로 계승되었다. 중화문화협회는 회원이 4백여 명으로, 한·중(한국·중국) 양 민족의 문화교류 사업을 촉진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나 문화사업을 통해 마침내 혁명을 이룬다는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김규식·김구·조소앙·김원봉 등이 참여하였다.
 

  한편 김규식이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 각료들은 한·중(한국·중국)인 간에 실제상의 호조와 감정상의 융화를 도모하는 데는 우선 언어와 문자가 잘 통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여 1922년 10월 1일에 상해 유일의 한인학교인 인성학교 안에 야학교인 제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한인들에게는 중국어와 중국문을, 중국인에게는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쳤고 공통어로 영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본격적인 한·중(한국·중국)연합의 어학전문학교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중국인과 함께 공동으로 합자하여 1923년 9월 17일에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한 바 있다. 이는 김규식이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학교로, 그는 본학원의 교장이자 영어 교수로서 한·중(한국·중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남화학원내의 한인학생들은 자치회를 조직하여 학생 간에 서로 도왔고, 또 학업에 열중하면서 경호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과 내통하는 밀정을 색출하는 등 활약하였다. 김규식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의 정선을 일깨워 주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다.
 

 한편 1927년에 김규식은 유자명·이광제·안재환, 그리고 중국인 목광록(睦光錄)·왕조후[王條垕], 인도인 간타싱·비신싱들과 연합하여 동방의 피압박민족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서 벗어나 완전독립을 쟁취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김규식이 독립운동의 기반이 미약한 한인들은 중국인을 비롯한 피압박민들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야만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조직한 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들어오는 데도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침체 돼가는 상황에서 김규식은 독립운동의 무대가 중국영토인 이상 중국인의 협조와 이해 없이는 항일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제와의 투쟁에서 한인과 중국인들의 연합전선이 가장 효과적인 운동전략이라고 판단하였다. 중국인들도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을 통해 민족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양측의 공동 연합은 용이하였다. 이 연합회에서 김규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기관지로 한국어·중국어·영어 3개 국어로 된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각 국에 발송하였고, 비밀리에 지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한편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난 후, 독립운동계의 통일운동은 좌절되었으나 이를 극복하고자 민족유일당운동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전민족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계파간에 통합운동이 성취되어 우파는 한국독립당으로, 좌파는 한국독립운동자동맹으로 일단 통합되었다. 일제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고, 이어 이듬해 l월에는 상해사변을 일으키자 중국내에서의 반일운동은 최고로 고조되었다. 이때 한인 독립운동계는 이러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고 이를 기회로 포착하여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고 중국과의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규식이 이미 천진에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변화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규식은 상해로 와서 한국독립당의 이유필과 협의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통합 알선에 노력하였다. 김규식은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 중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각지에 있는 한교회(韓僑會)를 연합하여 상해에다 한교연합회를 조직하고 중국 측의 화교연합회와 연합하여 한중연합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교연합회를 새로이 조직하기 보다는 각 지에 있는 기성단체를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이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김규식은 각 단체의 협조와 융화를 호소하여 상해의 한국독립당과 남경의 한국혁명당을 통합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만주의 재만한국독립당과 길림의 조선혁명당·한국독립운동자동맹 등 제단체들이 참석하여 1932년 7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준비회를 구성하였고, 11월 10일 남경에서 김규식이 대표자인 한국광복동지회의 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 등 5개 혁명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 집행위원회는 비서부·조직부·선전부·군사위원회·경제위원회·외교위원회의 각 부회를 설치하였는데, 김규식은 외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인의 전선 통일을 일단 완성한 후 김규식은 대일전선통일동맹의 이름으로 중국 측 항일운동과 연합, 제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김규식은 중국의 동북의용군후원회와 연락을 갖고 한국의 독립운동계와의 합작을 제의하여 중국 측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중민중통일동맹」이 구성 되었다.
 

 한중민중통일동맹은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데 우선적으로 재정을 확보할 필요를 느끼고 이를 위해 미국의 한·중(한국·중국)인 교포들에게 원조를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이 기회를 통해 미국에서 대일투쟁을 위한 선전활동도 전개하고자 계획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집행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중국측 집행위원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상해 중국인변호사협회장, 금융기관장, 광동정부와 남경정부의 전현직 관료들, 전중국선도(善導)협회 인사들, 그리고 교육계·언론계의 중진들이 망라되었다. 한중민중통일동맹은 계획 수행을 위해 김규식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규식은 한중민중통일동맹위원 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동북의용군후원회로부터 5천원의 여비를 받아 1933년 1월 초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렇게 멀리 미국으로까지 가서 운동자금을 모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한·중(한국·중국)인들의 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세의 불안정으로 생활이 극도로 불안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징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미주의 교포들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국외의 어느 지역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침체되자 재미동포의 독립운동자금 모금도 예전처럼 활발치 못한 실정이었는데 이에 김규식이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중국 측에서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하는 데 동의한 것은 비교적 미국 사정에 정통하며 외교가적인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대일전선통일연맹 규약 및 강령과 조직조례, 그리고 「원동정세」라는 중국과 한국민족들이 탈취당한 영토와 권리와 자유의 회복을 주장하는 각서를 갖고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각서 「원동정세」는 53면의 등사물로 만들어져 중국과 미국에 있는 외국인사들에게 배부되었다. 여기서 김규식은 원동지역의 지리적 관계에 대하여 논하고 일본의 한국침략 역사를 임진왜란(1592)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술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고 그럼으로써 만주에 발붙일 거점을 얻고 나니 이제 중국의 완전한 예속과, 태평양의 정복과, 세계의 지배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아시아 본토 정복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므로, 중국이 이제 일본의 세계제국 건설을 위한 전쟁목표물이 될 숙명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동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일본이 23년 전에는 한국을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을 믿고서 오늘날 만주를 점거하였고, 열하지방(熱河地方)을 점령하려 하면서 게다가 중국전체를 지배하고 끝내는 예속시키려 위협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아직도 여전히 원동문제의 열쇠가 되며 어쩌면 이번에는 세계의 대화(大火)의 도화선이 되거나, 흑은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군국주의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인이 됨으로써 절박한 세계적 참극을 예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의 재가없이 1905년의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자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이를 ‘보호조약(을사늑약, 1905)’이라 하여 한국민에게 강제하고 무력으로 예속시키고는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이 한국의 ‘자애로운’ 지배자로 자처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치하의 한국의 행정, 교육실태, 토지와 농업·임업·어업·광업·상공업 등에서 일본의 침탈을 열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한민족은 정치적으로 피정복·피지배·피압박 민족일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압박되고 수탈된(혹은 피수탈 중인) 민족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토(韓土)는 한인의, 혹은 한인을 위한 한토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령 이상의 것으로, 일인의 그리고 일인을 위한 한토인 것이다. 한민족은 단지 일본 민족의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통 노예나 심지어 개라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나머지는 얻어먹을 수 있는데 비하여, 잔악한 일인 주인 밑에 있는 한인노예들은 부스러기조차 얻어먹을 수 없으니, 그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관하에 허다한 수의 일인 이민들이 한토로 도입되는 반면, 한인소작인·농민·노동자들은 만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이 이러한 상태, 즉 궁지에 몰릴 때 그 소수(그러나 강력한 소수)가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와는 정반대임을 주장하는 하나의 새로운 원칙에서 어떤 위안을 얻고자, 기실 거기서도 얼마안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공산주의적 및 과격한 볼셰비키 경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민족은 태양 밑의 어느 것이건 일본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나간 22년간 세계의 지식계급(?)은 건물, 상공업의 개선과 발전(일본과 일인들을 위한), 도로와 그 밖의 수송기관, 시·도(市·道)의 건설공사, 항만과 기타 해운의 개선, 요새화와 국방(일본을 위한) 등에 걸친 훌륭한 건설적 성과를 과시하여,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에서의 개혁과 발전』이라는 제목의 예쁘게 장정되고 좋은 말을 늘어놓은 조선총독부 선전용 사탕과자만 공급되어 왔다. 
꼭 같은 심리적 배경에서 일본의 대정치가들·외교관들·군사지도자들도 다 같이 크게 나팔을 불어, 그들은 만주의 3천만 중국인(그리고 소수의 만주인)의 자연 발생적 의사 표시에 ‘응하는’ ‘하나의 자애로운 행위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동의 항구적(?) 평화와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대만주국을 수립, 승인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언하였다.
 

 일본은 1905년 한국에 보호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하고, 드디어 1910년 이를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할 때에도 그것이 ‘당시의 한국 황제와 국민의 뜻이며, 원동의 항구적 평화와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당시의 맹목적이고 관대하고 잊음이 많은 세계를 향하여 꼭 같은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문명세계는 이러한 우롱을 얼마동안이나 참을 것인가?…

  이어서 김규식은 미국이나 영국이 과거에 일본의 한국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용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이 일본의 중국 침략은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일본은 세계제국의 야욕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지 않는 한 원동(遠東)의 평화는 있을 수 없고, 원동에서 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면 이것은 곧 또 한 차례의 세계 전쟁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국이 원동에서의 전쟁 참여는 불가능하므로 고투하고 있는 4억 이상의 중국인과 2천 3백만 한인들의 손에 소총과 탄환·기관총·비행기·탱크와 그밖에 무기, 그리고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규식은 또 미국이 장차 무역확대를 위하여 원동시장을 보존하려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잉여 산업기계류를 중국의 수요에 공급하면 침체 상태에 있는 미국내 산업이 전시 수요로 인해 활발해 질 것이라는 실리적인 면도 아울러 강조하면서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북미 각처를 순회하며 강연과 연설로써 반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인과 중국인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일본의 식민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과 중국 민족들이 탈취 당한 영토와 권리, 자유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여 조국을 잊어버리고 있는 교포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였다. 미국을 순회하는 동안 김규식은 위병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규식은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쉬지않고 강연·연설을 하였다. 1933년 4월 5일에 있었던 로스앤젤레스의 부락베스트구루노류우대학에서의 강연에는 약 5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김규식의 연설을 경청하였고, 이는 유선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지켜본 친일본 계통의 신문들은 김규식이 ‘제국(일본)’에 대해 악선전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김규식은 미주지역의 단체들을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하도록 주선하여 재미대한독립당·대한인민총회·재뉴욕대한인교민회·재하와이대한인국민회·재미대한인민국민회총회 등이 이에 가맹하였다. 그리고 수천불의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1933년 8월경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협의기관 형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일전선통일을 위한 조처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 3월 1일 남경에서는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항일전선에서 강력한 결속력과 통제력을 가지는 실질적인 대동단결 조직을 조성하고자 김규식을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여러 차례 토의를 하였다. 본대회에서는 대동단결 조성 방침안을 만들어 이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고 각 혁명단체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의견을 모으고자 4월 22일부로 7개조의 건의서를 각 독립운동 단체에 우송하였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의 조직에 관한 방안·강령·정책 등, 토의를 위하여 대표 수명씩을 파견할 것’이라는 통지와 함께 대동단결체 조직에 관한 방안과 성격을 나타낼 정책의 초안 제출을 요구하는 통고문도 발송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단체들을 실질적으로 통합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한편 김규식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 이후 흩어진 임시정부가 1933년 3월 항구에서 재조직되었을 때 국무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34년 1월에는 국무위원 겸 외교장으로 당선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외 단체와 민중에게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대동단결체의 신조직이 만들어지면 이를 수용한다는 국무원 포고를 발하였다. 김규식은 새로운 당의 창설을 위해 임시정부와 대일전선통일동맹의 이상을 연결하고자 한 것이다. 김규식은 혁명단체 통일회의가 구체화되어 가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대동결단체 통합에만 주력하였다.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 1935년 2월 26일에야 중국 내의 단체들의 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6월 20일에 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재미대한독립당·뉴욕대한인교민단·미주국민회총회·하와이국민회·하와이혁명동지회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예비회담을 갖고 대동단결을 위해 각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6월 29일 정식회담에서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정하고 이어 당의·당강·정책 등의 제정을 의결하였다.

당 의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구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5천년 독립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며 정치·경제·교육의 평소(平素)를 기초로 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국민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당 강

1. 구적 일본의 침탈세력을 박멸함으로써 우리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2. 봉건세력과 일전 반혁명세력을 숙청함으로써 민주집권의 정권을 수립한다.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고 국민생활상 평등제도를 확립한다.
4. 일부를 단위로 한 지방자치제를 갖는다.
5. 민중무장을 실시한다.
6. 국민은 일절의 선거와 피선거권을 갖는다.
7. 국민은 언론·집회·출판·결사·신앙의 자유를 갖는다.
8. 여자는 남자의 권리와 일절 동등하도록 한다.
9.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민에게 분급한다.
10. 대규모의 생활기관과 독점적 기업을 국영으로 한다.
11. 국민 일절의 경제적 활동은 국가의 계획아래 통제한다.
12. 노농(勞農)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13. 누진율의 세제를 실시한다.
14.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국가경비로써 실시한다.
15. 양노·육영(育嬰)·구제 등 공공기관을 설립한다.
16. 국적(國賊)의 일절 재산과 국내에 있는 적일본의 공사유재산을 몰수한다.
17. 자유·평등·호조(互助)의 원칙에 기초하여 전세계피압박민족해방운동과 연결 협조한다.

정 책
1. 국내의 혁명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내외의 전민족적 혁명노선을 결성한다.
2. 국내의 무장부대를 조직하고 총동원을 준비한다.
3. 적 세력에 아부하는 박동세력을 박멸한다.
4. 국외의 무장부대를 확대강화한다.
5. 해외 우리민족의 총단결을 촉성한다.
6. 우리 혁명운동에 동정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는 그와 연결을 기도한다.

  이어 남경에서 7월 5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해체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민족혁명당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국외 독립당촉성회와 국내 신간회의 혁명적 전통의 계승이라는 의식 아래 성립되었다. 이는 민족통일전선의 가장 큰 성과로써 김규식의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의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전민족역량을 총단결하며 또 중·한(중국·한국) 양민족 연합항일전선을 건립하여야 하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여기서 김규식은 제1차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조소앙·김원봉과 함께 규칙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당의·당강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민족혁명당에는 중앙에 중앙집행위원회가 있고 그 아래 실무기관으로서의 서기부·조직부·군사부·국민부·훈련부·조사부가 있었다. 각 부장은 중앙집행위원 중에서 선임하였는데 김규식은 국민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당의 중앙정책을 결정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당을 대표하여 대외관계의 사무를 처리하고 당의 각종 기관을 설치하고 당의 일절 공작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주축 세력인 한국국민당은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인사들이 혁명당에 대거 참여하고 있었고 여전히 임시정부의 해체를 계속 주장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김규식의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통일전선 구축에는 실패하였으나 임정고수파를 제외하고는 민족운동 세력의 좌우파가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의 통일전선운동의 실패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대동단결체로서 출발한 조선민족혁명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며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민족해방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 민족이 세워야할 민족국가의 건설방향을 제시하고, 창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세계대전(1차 세계대전, 1914) 후 일시적 안정기에 보지(保持)된 열강의 표면적 균세(均勢)는 일본의 만주침략과 독일의 재군비 및 이태리(이탈리아)의 이디오피아에 대한 군사행동 등에 의해 동요 교란되었고 이 표면적 균세의 기초 위에 건축되었던 국제연맹 군축회의 및 기타 각종 조약 등 현상유지의 평화기구가 결정적으로 파괴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한 시간문제가 되었다.… 국제·국내의 정세가 긴박한 이때를 당하여 우리민족은 통일족 지도 아래 전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하고 강도 일본의 박멸에 대한 결전을 하기 위하여 이에 통일적 대당을 결성하는 당 창립 대표대회가 산출되었다. 그런고로 우리 혁명에 관한 원칙주장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적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자주 독립을 완성할 것
2. 봉건제도와 일절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족공화국을 건설할 것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우리 민족의 각개(各個)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할 것
  이상의 원칙 주장에 의하여 우리 민족혁명의 통일적 당이 조직됨은 우리 혁명운동의 대단한 발전이며 또한 위대한 성과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만간 일본이 항복한 후 해방된 조국이 어떠한 모습을 갖고 출발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민족이 나갈 길을 제시하였다. 조국이 해방된다해도 민족국가의 건설방향이 제시되지 않을 경우에 오는 혼란은 민족사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당의·당강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민족혁명당은 민주사회주의적인 정부를 구상하였다.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이 조소앙계열의 이탈로 소란해진 1935년 10월 20일에 개최된 중앙집행위원 6차 회의에서 사고에 의한 사직원을 제출하였는데,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김학규가 김규식의 후임으로 국민부장에 임명되었다. 김규식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사천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외국어 및 외국문학과 과장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영문학 교재와 영어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0년에 사천대학에서 출판된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 입문(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ma)』은 김규식의 저서로, 동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김규식은 민족혁명당 국민부장을 사임하였으나 여전히 중앙집행위원이자 당원으로서 남아있었다. 이후 민족혁명당은 각 정파간에 내분이 일어나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지 3개월 만에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계가 탈퇴하였으며 1937년 4월에 이청천계가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의 민족운동 전선을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자, 1937년 11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동맹·재건한국독립당·대한인독립단 등 좌익계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 강령을 정하였다.

  1.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진정한 민주주의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2. 국민의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를 확실히 보장한다.
  3.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의 일체 재산을 몰수한다.
  4. 근로대중의 생활을 개선한다.
  5. 국비에 의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을 실시한다.
  6. 정치상·경제상·사회상 남녀평등권을 확보한다.
  7.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에 대해 동맹을 체결하거나 우호관계를 증진한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좌익계열과 통합이나 연맹체로써 기존의 당의 존재가 그대로 인정되면서 각 단체가 연합하여 사회혁명이나 계급혁명이 아닌 민족주의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것을 공동노선으로 하였다. 한편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무한전투(武漢戰鬪) 등에서 중국과 연합하여 중일전쟁(1937)에 참여하였다. 한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하와이국민회 등 민족주의 우파계열들은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한국독립운동계는 중국과 함께 연합하여 공동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중국은 중일전쟁(1937)이 확대되자 국공합작을 시도하여 성공하고 한국독립운동계에 중국과 함께 연합전선을 펼 것을 권유하였다. 김원봉과 김구는 연명으로 1939년 5월에 「동포와 동지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포하여 “통일적 조직하에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역량을 집중”하여 공동전선을 펼 것을 다짐하고 다음과 같은 정치강령을 제시하였다.

  1.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다.
  2.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설한다.
  3. 국내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공사재산 및 매국적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한다.
  4. 공업·운수·은행 및 기타 산업부문에 있어서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는 각 기업을 국유로 한다.
  5.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하고 토지의 일체 매매를 금지한다. 조선농민의 대부분은 소작인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자의 토지 및 친일적 대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으나 그 토지는 국가가 몰수하고 그대로 농민에게 분배하여 매매를 금지한다. 이것은 가혹한 예속관계로부터 해방된 농민이 다시 과거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6. 노동시간을 감소하고 노동에 관계하고 있는 각 종업원은 보험사업을 실시한다.
  7. 부녀의 정치·경제·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녀 같이 한다.
  8.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를 향유한다.
  9. 국민의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를 실시한다.
  10. 자유·평등·상호부조의 원칙에 의거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한다.

  이러한 강령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강령과 내용이 거의 일치하여 좌·우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강렬히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39년 9월 양측이 합동하여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하였지만 임시정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심하여 통합운동은 결국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1940년 4월 임정세력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그해 9월에 광복군을 결성하고 1941년 11월 건국강령을 공포하였다. 이 건국강령은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하여 작성되었는데, 일찍부터 각 정파는 거의가 삼균주의와 동일한 이념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선거실시, 의무교육실시, 토지의 국유화와 농민 분배, 생산기업의 국유화 등을 공동의 강령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1940년 말부터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원들 상당수가 항일격전지인 태항산으로 가기 위해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중국 국민당 영향하의 민족혁명당에서 중국공산당의 영향아래로 간 것이다. 한편 민족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1940년 가을 경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 중심으로 결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도 1941년 11월에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중경에서 개최, 임정참여를 선언하였다. 따라서 산하 부대인 조선의용대는 4월 30일에 있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광복군 편입을 결의함으로써 7월에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광복군과 연합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최전선에서 전지공작에 투입되었고, 영국군과 협력하여 인도·버어마(미얀마)전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미국전략정보처(O.S.S)와 합동하여 낙하산 투하 훈련을 받으며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준비하였다.
 

 1942년 1월 10일 사천에서 중경으로 온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들어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전선을 통일할 것을 선언하였고 10월의 제34차 임시의정원부터 민족혁명당의 좌익계열 인사들도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때까지 임시정부와 오랫동안 결렬하고 있었던 김규식도 10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고, 동시에 선전부장으로 피임됨으로써 다시 임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임정에 합류하였으나 김규식은 미주지역에서 여전히 민족혁명당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3년 김규식은 한중민중통일동맹의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하였으며 그의 주선으로 재미한인사회의 제단체가 한·중(한국·중국) 연합으로 반일항전의 원조를 약속받았고 또한 대일전선통일동맹에 가담케 한 바 있음은 앞에서 서술하였다. 김규식의 방문 후 미주지역에서는 중국후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다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발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재미한인사회에서는 그 산하 군대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기 위하여 중국후원회를 조선의용대후원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지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그러다가 민족전선연맹이 임시의정원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로 통합하자 1942년 6월 30일에 조선의용대 후원회는 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되었다. 1943년 8월 5일에 김규식은 중국 중경의 국제방송국을 통해 미주에 있는 민족혁명당 지부 당원들에게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소식」을 방송하였다. 방송을 통해 김규식은 1943년 7월 26일에 김구·조소앙·이청천·김원봉, 그리고 임시정부 및 한독당(한국독립당)·민혁당(민족혁명당) 요인들과 함께 장개석 총통과 만나 다음과 같이 독립운동의 계획안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1) 전투단위의 보다 효과적인 조직을 갖는다.
(2) 임시정부를 조속히 인정하며 비록 그것이 현재 당장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한국 내외에서 우리의 공작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내 민중혁명의 힘을 총궐기하도록 격려하고 고양시키며 촉진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현상태의 인정을 희망한다.
(3) 민족회복을 위한 우리의 투쟁을 보다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수행하고,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에서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등 문제에서 우리가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큰 기백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계속적이고 증대된 실질적인 후원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4) 우리 진영내 통일문제에 관해 우리는 모든 방향에서 보다 완벽한 협동을 향한 계획과 진척상황을 간단히 보고하고, 특히 임시정부의 위신과 권위를 고양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을 전하다.

  김규식은 이제 완전히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는 소식을 미주동포에게 전하면서 “우리는 과거 반세기 동안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한국의 안팎에서 피와 땀의 대가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목표인 완전 독립과 최종적인 UN의 승리, 그리고 세계 모든 민족과의 평화와 일치의 완성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의 내외에서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고 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자 우리의 힘을 보다 잘 조직하고 통일하며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임정과 통합되기 전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담한 미주의 제단체에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해체되었음을 알리고 미주의 제단체가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결합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태평양전쟁(1941)에서의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앞으로 독립운동계의 민족전선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43년 2월 제7차 전당대표대회를 열었다. 김규식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김원봉은 총서기에 재임하였다. 전당대표대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은 우리 민족의 자유 독립을 쟁취하는 동시에 중국의 대일항전과 세계의 반파시스트전쟁의 승리를 조속히 이루기 위하여 주석 김규식과 총서기 김원봉을 중심으로 더욱 더 단결하고 임시정부를 확대 강화하여 가장 유력한 혁명정권의 기구가 되도록 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편 통합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제 36회 임시회의에서 통일전선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김구는 한독당(한국독립당)의 주석으로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서 부주석으로 피임되었다.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중경에 머문 김규식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지 못할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6천리를 장정하여 1945년 1월 31일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와 광복군에 참여한 김준엽과 장준하는 후일 회고에서 함께 병석에 있는 김규식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무슨 병환이십니까?”하고 물으니 “나에게 무슨 병이 있는가 묻지를 말고, 무슨 병이 없는가 하고 물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김규식은 1944년에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과 1945년에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이란 책을 출판하는 등 천성적이며 부지런한 학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편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화북지방으로 이동한 좌파계열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활약하다가 이를 해소하고 1942년 7월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하여 자주 접촉을 시도하였고 1944년 12월에는 국내에 건국 동맹과 연락하여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서로간의 노선을 절충하며 건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민족 대단결의 통일체를 결성하여 일제와 투쟁하려던 움직임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조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12장 조국의 해방과 환국

  많은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정부로서의 명맥을 이어가던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1941)이 일어나자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선에서 중국·영국·미국 등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작전을 개시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광복군은 국내로 전격해 들어가 일제와 전면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훈련하던 중 예상보다 일찍 전쟁이 종결되었다. 미국이 8월 4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기량을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빼앗겼던 조국 땅에서 일본과 격전을 벌려 일본군을 몰아내려 했던 투지와 열망이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고 만 것이다.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 들어와 8월 12일 청진에 상륙하였다. 당시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한반도가 소련에 의해 점령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한 38도선 분계를 소련에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소련 측이 받아들임으로써 38도선이 확정되었고 조국의 해방은 국토의 분단으로 나타났다.
 

 국내의 민중들은 임시정부에 대하여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으나 임시정부를 독립의지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조국해방의 주체로서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의 귀국 소식을 듣자, 열광적으로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 정부 요인들도 3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의 귀환을 큰 설레임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부주석인 김규식도 1913년 조국을 떠난 후 32년 만에 돌아가 밟을 조국땅의 모습과 조국의 내음을 그리며 새로운 조국 건설의 대희망을 안고 귀국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남에서 권력을 장악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일체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제1, 2진으로 나누어 국내로 들어왔는데, 미군정이 보낸 중형수송기편으로 중경을 출발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김규식은 1945년 11월 23일 하오 4시에 김구·이시영·엄항섭·유동열·김상덕·선우진·민영완·장준하·윤경빈·김진동·안미생·유진동 등과 함께 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미군정은 개인자격이라는 단서를 붙여 국내 귀환을 허락하였으나 국내의 동포들은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감격적으로 맞이하였다.
 

 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 국내는 식민치하에서 억눌렸던 정치적 열정이 곳곳에서 분출되어 혼란한 형국이었다. 국내의 정치세력으로는 식민치하에서 조직적인 연대성을 지켜왔던 건국동맹이 있었다. 이것은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사회주의,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 세력을 망라하여 조직한 것으로, 건국 준비를 조직적으로 전개하여 왔으며 해방직후에는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동 위원회는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이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혼란한 시기의 치안유지와 민심안정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도 좌파세력으로 분류하고 대표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직 내의 우파세력은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고 임시정부를 봉대(奉戴)하여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우파세력들은 일제치하에서 주로 실력양성론 및 자치론에 입각하여 물산장려운동, 언론교육운동을 전개했던 지주·자본가·지식인·친일관료 등의 지배계층으로 이후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구성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파와 급진세력들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인민위원으로는 김규식을 비롯하여 이승만·김구·김성수·이용설·김병로·신익희·안재홍·조만식 등의 우익계 인물들과 좌익계 인물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9월 14일에는 중앙위원회에서 인민공화국 선언과 강령, 시정방침이 결정되었는데, 선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 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사회의 실현을 기한다.”고 표명하였다. 그리고 정부내각부서의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내무부장에 김구, 그리고 김규식은 외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성명을 통해 여운형 등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은 친일파들로 조직되었다고 공격하고 인민공화국의 불법화와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중경 임시정부를 추대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일체의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인 건국운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38도선 이남의 한국땅에는 미군정이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다른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미군정청내의 한인 관리를 주로 한민당(한국민주당) 계열로 충원하여 경찰 부서 등 주요 행정부서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규식은 환국한지 이튿날인 11월 25일,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그에게 지식과 신앙을 심어 주고 키워준 새문안교회를 방문하고 일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15분 정도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다.

  국내 정치운동이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래간만에 돌아와도 부끄러운 것과 같이 우리 한국의 교우들도 통일된 교회를 가지도록 하여 모범적인 교우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고 나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큰마음으로 일치 합류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교회가 통일되어 정치적으로나 여러 가지 운동에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 조선의 해방운동에는 신교신자의 공헌이 많습니다. 금후에도 교회의 통일이 혁명운동에 도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동일을 말하면서도 정치적 통일과 견주어 연설하는 등 오로지 통일을 강조하였다. 환국 후 5일째 되던 11월 28일에 국내 정치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민공화국에 대해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정부각료 입각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이승만 및 임정요인들과 함께 정동교회에서 열린 조선기독교 남부대회에서 미군정과 임시정부요인 환영대회에 참석, 환영사에 대한 답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만 여러분과 군정관 여러분들께 특별히 감사드려 마지않습니다. 엊그제까지 땅 속에서 해를 보지 못하는 생활을 하다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오늘 이와 같이 여러분들의 마음으로의 환영을 받게 되니 칠층(七層) 하늘에 올랐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너무 절정에 올랐다간 떨어져서 부상을 당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1837년부터 1897년까지, 즉 60년까지 즉위하였는데, 여왕의 등극 60년 기념 경축식이 굉장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세계 각 국의 대표들이 와서 자기 나라에서 제일 귀한 예물들을 증정하고 성대한 잔치가 일주일간 계속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에 경축하는 기사가 통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통해서 잠잠하다가 마지막에 기사가 났는데, ‘오직 하느님이 허락하셔야만’ 하는 한 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에는 ‘하느님이 허락하셔야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 대업을 성취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여야만 될 것이올시다. 김주석(金主席 : 김구) 아니라 김(김구)주석의 할아버지의 힘이라도 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여러분과 우리가 단단히 손을 잡아서 한 손으로는 하느님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잡고 굳세게 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자기를 정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그리스)에 유명한 철학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이 들어왔을 때 이 철학자는 세계를 정복한 왕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세계를 정복 했으나 아직도 큰 적이 남아 있으니 인제 당신은 곧 자신을 정복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 우리 조선 사람은 과거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남에게 정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김(김구)주석이 김(김구)주석 자신을 정복해야 할 것이며, 이승만 박사는 이승만 자신을 정복해야 할 것입니다. 김규식은 김규식 자신을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각자를 정복하는 날 비로소 미군은 ‘굿바이’ 인사하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더 스비다니아’ 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카이로회담(1943)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허락하셔야만 한다’는 굳센 신앙심과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잡고 굳세게 나가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신념, 그리고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각자를 정복해야 한다’는 희생정신은 김규식이 조국을 위해 몸바쳐 일한 일념이며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그의 정신적 지표였다.


제13장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통일 임시정부수립운동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각계의 지도자들과 만나 정부건설을 위한 당면책을 모색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는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여서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회담(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을 진행하였는데, 거기서 한국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조선을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조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제안은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미국·영국·러시아·중국) 각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하기 위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3. 조선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4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미국·영국·러시아·중국) 제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관구와 북조선 소련관구의 행정·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미국·러시아)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의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이 그 상세한 내용에 대한 정보와 이해없이 국내에는 12월 28일에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에 관한 소문만 확대 전달되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한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의 압제하에 시달리다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할 꿈에 차있던 국민들에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임시 정부측에서는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결의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사상·계층을 망라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전민족적인 의견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실제 합의내용을 보면 3항의 후반부에 신탁통치안이 간략히 언급되었을 뿐 전반적인 내용은 통일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합의내용의 일부인 신탁통치에만 감정이 격해졌고 임시통일정부 수립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김규식도 김구와 함께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반탁 범국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반탁운동은 12월 30일 송진우가 피살되면서 좌·우익의 극한 투쟁으로 번져가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보수파 한독당(한국독립당)과 이승만의 독립촉성협의회는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하여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한편 좌파세력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찬탁을 대중에게 호소하였다. 이들은 연합국의 신탁안은 한국독립을 일보 앞당겼을 뿐 아니라 현단계에서는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우익 측의 반탁운동은 국제정세의 무지에서 나온 민족자멸책이라고 비난, 공격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김규식은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냉철히 읽고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장래를 분석해 보았다. 김규식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가 주목한 것은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가 제1항에서 제시한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김규식은 독립운동 당시 좌·우합작의 경험을 살려 좌·우익의 극한 투쟁을 피하면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강대국의 결정을 일단 수용하여 강대국이 인정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내세워 강대국과 협상토록 하는 구도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문제도 수립된 임시 정부에서 그 실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김규식의 의견은 결코 찬탁이라 할 수 없으나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은 바로 찬탁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김규식은 강대국의 결정을 무조건 반탁으로 몰게 되면 우리 민족이 힘에 의하여 분열되고 말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모스크바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주요점이 축소, 인식되어 신탁통치안은 ‘소련의 음모’라고 공격하면서 이승만을 중심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반탁운동을 더욱 맹렬히 전개하고 모스크바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를 수용하는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매도하였다. 사실 신탁통치는 미국에 의해 제안된 정책이다. 미국무성은 일본인들의 정보에 입각하여 한국의 기존 세력 대부분이 좌익, 친소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를 독자적으로 점령하여 소비에트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재정 및 군사면에서 따로 투자하지 않고도 한반도에서의 소련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신탁통치안을 제안한 것이다.
 

 한편 김구를 중심한 임정의 비상정치회의는 임정의 법통을 주장하며 역시 반탁운동을 주장하였다. 김구 등 임정파는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이렇게 반탁 주장의 논리는 달랐으나 반탁이라는 입장을 같이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는 비상국민회의로 통합하였다. 1946년 2월 1일에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민족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이승만 중심의 우익편향적인 분위기 때문에 김규식은 탈퇴하였다. 김규식은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는 여운형 측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준비위원회와 비상국민위원회가 동시에 해소,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규식은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이 결코 우리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없으나 한국이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의 하나라고 판단하였다. 이 결정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보다는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규식은 미국과 소련의 타협을 유도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식견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하여 여론으로 조성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아마도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이 반탁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면 우리 현대사도 지금과는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인 대부분이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냉철하게 조국의 장래를 점치기보다는 해방된 조국의 완전 독립을 무조건 달성하려는 의욕이 앞서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이승만과 한민당(한국민주당) 중심의 반탁운동이었던 것이다.


제14장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와 임시정부수립운동

  좌익은 찬탁, 우익은 반탁이라는 충돌사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김규식은 1946년 2월 18일에 해방 전 그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 전개의 기반으로 삼았던 민족혁명당을 탈퇴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탈퇴성명이 필요했던 것은 그가 어느 단체나 사상에 얽매임이 없이 순수하게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한다는 입장을 재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3월 20일부터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 제2항인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의 준비를 제1단계로 하고, 제3항인 임시정부 참여하에 4국 신탁통치안 작성을 2단계로 하여 차례로 실천해 나가되, 1단계를 위해 세 분과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4월 18일의 공동성명에서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 제2항의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 조항을 포함한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을 수락한다는 내용의 선언서에 서명하여야 한다고 표명하였다.
 

 김규식은 이것이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조건이라면 이를 수락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그 날로 방송을 통하여 이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계는 지나친 반공노선으로 소련군정을 자극하였고, 미군정도 이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정의와 그 자격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미군정이 친미적인 보수파 정당과 사회단체를 가능한 한 협의대상으로 삼고자 한데 반하여 소련 측은 모스크바(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에 반대한 단체나 개인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 측으로는 소련측 주장대로 반탁을 주장한 반공친미적인 인사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면 한국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성격은 당연히 친소정권이 될 것이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아놀드(Archibald V. Arnold)는 1946년 4월 27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을 수락한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한다고 하여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을 찬성한다든가 신탁 지지의 언질을 준다는 표시는 없는 것이며 선언문에 선언치 않고서는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하여 선언서 제출이 찬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님을 보장하였다. 아놀드의 성명이 있던 날 민주주의민족전선·공산당·인민당·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좌익계 32개 단체가 공동위원회에 선언서를 제출하였고, 5월 1일에는 비상국민회의·한민당(한국민주당)·한독당(한국독립당) 등 우익계 20여 개 단체도 선언서를 제출하였다. 이때에는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지지가 반드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탁치를 할 것인가의 여부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가 연합국과 협의하여 결정할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반탁운동을 전개한 단체나 개인은 공동위원회(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어 1946년 5월 6일 무기휴회를 결정하고 소련대표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다.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겨우 좌·우익이 일치하여 나가고자 하는 방향에 쇄기를 박았다. 이에 5월 12일 우익측 정당, 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곳곳에서 반소반공 시위를 전개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김규식은 대회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2~3주간 더 기다려 소련이 조선 문제 해결에 성의가 있어 속회된다면 그 결과를 기다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 정부는 대구에서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연설하였다.
 

 소련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한반도의 적화를 막으려 했던 미국으로서는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북분단과 민족분열을 감수하고서라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김구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고, 반탁을 내세우며 통일정부를 내세우는 다분히 이상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에 반해 김규식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국의 우위를 다지려 경쟁하는 한편 자국의 군정에 유리하도록 정책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친미·반소의 극우와 친소·반미의 극좌의 편향적 노선을 배제하고 민족내부의 자주적인 좌우합작의 기반을 조성하고자 중도파의 세력을 규합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하였다. 이것은 민족내부의 극한 노선을 방치하여 결국 미소의 공동보조체제를 깨뜨리고 급기야 민족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한 현실적이면서 합리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소(미국·러시아)간의 대결과 경쟁이라는 외적 한계와 좌·우세력간의 신탁·반탁 논쟁을 통한 권력 투쟁이라는 내적 한계로 말미암아 통일임시정부 수립운동은 점차 어렵게만 되어갔다.
 

 김규식은 고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맞이한 첫 부활절에 성결교회 교단에서 발간한 잡지인 『활천(活泉)』(1946.6 重刊 2號)에서 오랜 해외생활 끝에 돌아온 조국에서의 부활절 감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오늘 부활 주일은 우리 그리스도교회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날이다. 그중에도 해방 후 첫 번으로 자유롭고도 성대히 이 부활절을 지키게 되니 하나님께 감사무량하다.… 우리들은 해외생활 34년에 예배당 출석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하였다. 그것은 일본 밀정이 늘 우리의 뒤를 따름이다. 이럴 때 예배당을 지나면서 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마음놓고 예배 한번을 잘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심경이 어떠하였으랴. 그러던 우리가 환국 후 이 기쁜 부활 주일을 당하니 감개무량하다. 이때는 우리나라도 부활할 때요 천국을 건설할 때도 이 때임을 알아라. 저 왜적들이 남산 중턱에다 신궁을 지어놓고 우리들을 소끌듯 말끌듯 강제로 참배를 시키며 예배당에서도 별별 우상 놀음을 다 시킬 때 여러분의 고통은 어떠하였을까…
무엇을 구할까. 곧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구하자. 그리하여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자. 만일 우리가 이 나라 건설을 위하여 충성하다가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밀 한 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매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예수는 부활하셨다. 조선의 교회들아, 예수의 부활이 헛되지 않게 하라. 
정치적 혼란과 민족내부의 노선 분열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김규식은 나라 건설에 충성함은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깊은 신앙심에 있음을 고백하였다.

자료정리. 민족회의 상임공동대표 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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