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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우파 지도자 우사 김규식박사 3.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7.14 조회: 3469

제15장 좌·우 합작운동의 주도

  좌 우 합작은 처음에 여운형에 의하여 제의되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민족의 자주적인 노력으로서 난국을 극복하고자 김규식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그와의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모두 즉시 독립을 원하기는 했으나 국제적 흐름과 강대국의 역학관계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하에 좌·우가 합작한 통일정부가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의 대표요, 김규식은 중도 우파의 대표로서 그들은 민족주의의 중도세력을 결집하였다. 이들의 정치이념은 해방 전의 독립운동계의 좌·우 모두가 취한 민주사회주의였다. 김규식은 1930년대 독립운동계 좌·우익의 극한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된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던 연합전선 운동의 경험에서, 그리고 완전 독립을 위한 실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노선에 따른 민족의 분단과 미·소(미국·러시아)의 점령으로 인한 불안전한 민족독립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민족 내부의 정치적 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친일파들이 모든 미군정의 행정 요직을 장악하고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민중의 증오심은 미군정을 향하여 쏟아졌다. 이에 미군정은 극우세력을 멀리하고 그 대신 좌·우 양파의 온건 세력을 대상으로 한 합작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극우세력을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려 한 소련과 계속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첨예화된 좌·우익의 대립을 완화시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한 목적, 한편 극좌세력의 영향력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미군정 측에서는 버치(Leonard Bertsch) 중위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를 설복하여 좌·우합작을 공식적으로 지지토록 한 후 회의를 알선하여 1946년 5월 25일부터 좌우합작회의는 시작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에 나설 중심인물로 김규식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정 중심의 좌·우익 합작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측은 이승만을 통해 좌·우합작이 미국무성의 정책임을 들어 집요하게 권유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이승만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당시의 정세로 보아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본인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김규식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해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하였다고 한다. 좌우합작회의에는 김규식과 여운형·황진남·원세훈, 그리고 버치와 아펜젤러(Appenzeller)가 모여 시작하였는데, 우익의 거두인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좌익의 거두인 박헌영 등은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원세훈은 첫인사에서 버치에게 “나는 당신에게 부끄럽소. 우리의 일을 우리가 못하고 외국인의 알선으로 이같이 함은 대단히 미안하오”라고 하였다.
  

 합작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는 별도로 이승만은 1946년 6월 2일부터 남한 각지를 순회하여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처음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이리·개성·서울 등지에서 단독정부 수립과 공산당에 대한 투쟁의 방향을 밝혔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의 본래 구상은 미국무성으로부터 논의된 것이다. 1945년 말경 미국무성의 일반 관리와 미군정의 하지·랭던(William Landon) 등이 모여서 한반도 문제를 검토할 때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면 사실상 남한에서는 좌익세력이 오히려 우익을 제압할 수 있다는 분석에 도달하였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남한단정(단독정부)론이 거론되었고, 이러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은 외신의 보도에 의해 1946년 4월 6일 국내에 전달되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단정(단독정부)론을 내세우자 미군정은 6월 11일에 러치(Archer Lerch) 군정 장관의 명의로 정식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미군정은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검토하였지만 소련과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세력들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승만의 이러한 공개적인 주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무성의 심중을 헤아리고 자신의 입지와 한반도 정세를 결합하여 철저한 반공노선에 입각한 정치 안정을 주장하고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여 단정(단독정부)수립운동체를 단일화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17일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무성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졌다. 그는 미국무성의 일부 관료들과 위원들을 상대로 미정부의 대한정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정책으로 나가도록 역설하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은 그 뒤 미·소(미국·소력)간의 냉전체제가 자리잡으면서 미국 측에게 남한단독정부 수립정책 추진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박헌영의 극좌세력은 경찰 당국에 체포령이 내려져 지하에 잠입하였으나 여전히 친소반미의 남로당 좌익세력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좌우합작위원회는 극우·극좌 세력이 모두 배제된 중도 우파와 좌파의 합작인 셈이어서 엄밀히 말해 좌·우합작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 간에 내재해 있는 모든 이해와 감정을 초월한 대표적 기관을 설치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속개시키고 완전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7월 10일에 좌·우 양측의 정식 대표가 결정되었는데, 김규식은 우측의 주석이 되었고 좌측의 주석으로는 여운형이 맡았다. 6월 18일 좌우합작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았다.

  1. 대내(對內) 대외에 관한 기본 원칙으로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채선(採選)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불편부당한 선린(善隣) 외교정책이라야 할 것
  2. 좌·우를 막론하고 진실한 애국자며 진정한 혁명가라면 절대로 배격이나 중상을 금하고 이를 절대로 옹호해야 될 것
  3. 남·북합작은 북조선에 있어서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제외하고 언론·집회·사상의 자유가 허용된 후에야 비로소 합작이 가능할 것

  7월 25일 그들은 최종예비회담에서 양측의 의사규정을 결정하여 제1차 정례회담을 7월 26일에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좌익 측은 남북통일과 좌·우합작의 원칙은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김규식과 마찬가지로 여운형은 7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탁문제는 지금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카이로(카이로회담, 1943), 포츠담선언(1945)과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에서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은 모두 일반적 결정이니 우리는 정부를 속히 수립한 후에 이 문제를 토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의 견해와는 달리 좌익 측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7월 27일 좌·우합작 5원칙을 합작위원회에 제시하였다. 그 후 우익 측의 민주위원에서는 좌·우합작 8원칙을 제시하였다.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했던 이들 좌·우 측의 종전 안을 절충하여 10월 7일에 김규식과 여운형은 좌·우합작 7원칙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삼상회(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 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유조건몰수·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여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노동법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좌우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가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이 합작 7원칙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리하여 전 시대의 민족적 모순을 척결, 새로 건립되는 독립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토지개혁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여 토지를 매수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여한다는 내용으로, 이는 좌우의 극한적인 이견을 좁힌 것이었다. 그러나 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극좌 및 우익측 모두는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였다. 우익의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삼상회(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의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고 했을 뿐 신탁문제에 대해서는 하등 언급이 없었다고 비판하였고, 유상매수한 토지를 무상분여한다는 토지제도개혁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이를 예상한 김규식은 해명서를 발표하여 좌·우익의 의견차를 보여주는 신탁통치 문제와 토지문제, 그리고 친일파 문제에 대한 입장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였다.

  1.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의에 의하여…’ 운운하는 문구 중에 신탁통치를 언급치 아니하였다하여 탁치를 지지한 것처럼 대의소쾌(大疑少快)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의를 다시 숙독(熟讀)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결의 제3항에 의하면 신탁문제는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 그 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 쌍방이 검토 제안하여 4국의 동의를 얻은 후 미·소(미국·소련) 양정부가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 되는 우리 정부의 구성분자의 여하에 따라서 탁치의 실시여부가 결정되게 될 것이요,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리라고 믿으나 만일에 안 된다면 근본적으로 권양(捲揚)할 것까지 없을 것이다.
  

2. 토지문제에 대하여 첫째 국유·국영, 둘째 경자유전(耕者有田), 셋째 유조건 몰수(생활에 필요한 자작농 토지는 제외), 체감매상을 당하는 자의 생계 고려, 넷째 대지주의 재생방지 등으로서 원칙을 삼은 것인 즉 세목에 이르러서는 장래에 실시할 때에 적절하게 작량(酌量)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가기지(市街基地) 대건물에 대해서도 우리의 주장하는 정신은 매일반이다. 여하간 장래에 입법기관이 성립된 뒤 우리의 노력으로써 그 기관이 위에 말한 여러 가지 원칙을 심의 결의하고 법을 제정한 뒤에야 비로소 구속력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에는 우리 좌우합작위원회의 공동의견이 될 것 뿐이니 미리 기우를 가지지 말고 먼저 냉정히 연구함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면 양해하기 그렇게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다시 말할 것은 토지안에 있어서 우측의 일소부분(一小部分)에서 반대하나 이는 오해다. ‘몰수’는 적산 및 재산을 말함이요, ‘유조건 몰수’는 구왕궁·사원·기타 공공사업기관에 소유된 토지의 매매를 제한하여 그 기관 관리자의 불찰로 자본가에게 매도치 못하게 할 것이니,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그 토지를 소유하고 다른 경우에는 납세 대신 또는 유사한 수입으로 이를 대신 불하할 필요도 있다. ‘체감매상’은 지주의 생활을 보장할 것 외에 대지주의 토지를 현가에 비율적으로 체감하여 정할 것인 바, 소지주는 그 할인이 비교적 적을 것이다. 
‘무상분여’는 농민에게 소유권은 있으나 매매와 상속에서는 국가에서 관리하여 대지주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일체를 입법기관에서 정할 것이니 지금 이 문제로 반대는 착오이다. ‘국가 부담이 과도케 된다’는 염려는 실제 통계 숫자를 가지고 따질 문제요, 이러한 부담에 대한 방법이 없는 국가는 건설의 목표가 아니다.
 

  3. 7원칙 중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입법기관에의 참여를 불허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정기구에 있어서도 반역분자를 포용하는 것을 절대로 불허할 것이나 건국사업에 공헌이 있는 자는 이에 한하여 채용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인정한다.

  이 해명서를 통해 김규식이 좌·우의 문제를 모두 수용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좌·우측 모두가 애초부터 양보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측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특히 토지개혁안은 지주세력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한민당(한국민주당)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원칙을 수용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회의를 느낀 한민당(한국민주당) 소속의 좌우합작위원인 원세훈 등을 비롯한 16명의 한민당(한국민주당)원이 일차로 탈당하였으며, 이후 계속하여 2백 70여 명이 탈당하여 중도세력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김규식을 중심한 중간파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만을 추구하지 않고 민족의 통일과 발전을 지향하는 양심적인 민주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김규식은 1946년 10월 18일 좌우합작운동으로 한창 분주할 때 미국 『시카고 선(Chicago Sun)』지의 기자 마크 게인(Mark Gain)과의 인터뷰에서 주요산업체의 국유관리와 농지개혁 및 사회보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견해는 1930년대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을 때와 같이 사회민주주의 국가건설의 의사를 초지일관 유지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는 우익과 좌익을 동시에 공격하고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둘로 갈라놓아 한국에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우익은 쓸데없는 언쟁을 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좌익은 파업에 전념함으로써 10월말에 있을 입법의원선거에서 전국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급진 좌파들이 좌·우합작 5원칙을 계속 고집하자, 여운형은 민족전선에서 탈퇴하였고 당수직도 내놓았다. 그러던 중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그리고 신민당 3당이 박헌영의 주도로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뭉치고,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더욱 맹렬히 좌우합작위원회를 반대하였다. 이에 맞서 여운형은 인민당의 소수파와 신민당의 반박헌영파와 합세하여 10월 16일에 사회노동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극좌세력들은 철도총파업을 계기로 노선을 바꾸어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민중들이 가담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각 처에서의 연이은 폭동과 항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여운형은 테러를 당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김규식을 중심한 중도세력들도 광범위한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지 못한 채 편파적인 극좌·우파의 선전과 선동에 함몰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때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던 좌우합작위원회는 절박한 시대적 상황을 통감하면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정국의 혼란은 1946년 10월 1일의 대구 폭동 사건(대구 10·1항쟁, 1946)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김규식은 소요 사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미군정에 한·미(한국·미국)공동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미군정청의 군정장관 러치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A. E. Brown) 소장,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들이 덕수궁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미(한국·미국) 대표들은 위원회를 설치하여 충분한 조사와 타당한 해결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하였다. 토의결과 지적된 것은 경찰 간부 중에 일제 고등경찰로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악질분자들이 많이 등용돼 이자들의 행패가 경찰에 대한 민중의 원한을 사고 있다는 점, 또한 미군정에 있는 한국인 관리 중에 일제에 충성을 다한 친일분자가 많다는 점, 미군정에 있는 통역들의 행패가 심해 일종의 필요악의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과 그리고 식량정책의 불합리와 귀속재산 처리의 부정 등 군정 전반에 걸쳐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이러한 부조리가 결국 공산당이 민중을 선동하는 자료가 되어 금번 10·1 항쟁사건(대구 10·1항쟁, 1946)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김규식과 김구, 그리고 미군정의 브라운 소장은 1946년 10월 26일 한마공동회담 개최에 대한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조선 국민에게 

동족상잔은 언제나 죄악이다. 그것은 다만 민족의 역량을 소모하고 조국의 재건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도에 넘친 잔인한 행위는 국제적으로 조선민족의 위신을 추락케 하여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얼마나 비탄할 일이냐?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은 정치상·경제상 어떠한 불행, 불만이 있든지 또는 좌거나 우거나 어떠한 악질의 선동이 있든지 그 선동에는 속지 말고 여러분의 불평불만은 합법적으로 해결을 얻기로 하고 각각 고생스러운 생활을 참고 지켜가면서 동포끼리 서로 싸우는 비극은 즉시 그칠 것이다. 
살벌과 파괴와 방화 등은 가장 큰 죄악이요 민족의 대불행이다. 
여러분은 다만 합작에 의한 고심 참담한 건설을 함께 신뢰하고 지지하면서 총역량을 집합하여 이 중대한 시국을 수습키로 하자! 
합작노선을 절대 지지하는 것만이 민생문제의 해결과 임시정부 수립과 자주독립 촉성에 유일한 길이다. 여러분이시여! 명심하라! 안정하고 모든 직장에서 정진하자!

  그러나 미군정은 미국의 전략적 입장이 더욱 중요했으므로 한국의 민생문제, 민족문제를 해결할 복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12월 5일 경찰에 대한 원한, 군정청내의 친일파 문제에 대하여 적당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결국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 훈련, 고용된 경찰력은 해방 후 미군정에서 그대로 경찰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 경찰을 지도하고 있던 마글린(William Maglin) 대령은 마크 게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쓰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천성적으로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공정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친일파들이 일본인에게 충성했다면 또 다른 점령국인 미국을 위해서도 충성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군정 당국의 일반적인 견해였을 것이다.


제16장 과도입법의원과 민족자주연맹에서의 활동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되고 전국적으로 농민폭동, 노동자파업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미군정은 소요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충분한 조사와 아울러 미군정 전반에 대한 조사를 좌우합작위원회에 의뢰하였다. 미군정은 좌익 측으로부터 점령군이라는 비판을 받고,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소련군 점령하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인민이 참정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미군정은 이를 의식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군정장관인 러치(Archer Lerch)는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하지 사령관에게 건의하였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을 때,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인 김규식에게 과도입법의원 설립에 관한 자문을 해왔다. 여기서 김규식은 입법의원을 세워 민주적 개혁을 실시하고 동시에 한국인이 군정에 참여하여 점차 민정으로 이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과도입법의원 창설은 임시 조선민주정부의 수립을 기하며 정치적·경제적 및 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초안을 작성한다는 목적을 제시하고, 1946년 8월 24일 군정법령 118호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입법의원 창설에 대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재판이다.”·“통일정부를 지연시키는 길이다.”·“미군정 연장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이다.”·“민주의원의 법통을 무시하는 일이다.”라는 등 비난이 드높자 미군정 측은 “이는 행정권 이양의 한 단계이며 인민이 정부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발전의 한 표현이지 남한 단정(단독정부)수립이나 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다.”고 발표하여 여론을 진정시켰다.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이 간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인물 45명이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좌익측 인사들이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으로 체포 중이거나 지하로 잠입하였으므로 좌우합작위원회는 엄밀히 말하여 좌·우의 광범위한 기반을 얻지 못하였으며 민족적 염원과는 상관없이 좌익은 완전 이탈되었다. 민선의원 선거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파견한 선거관리위원회가 감시 및 관리를 하였는데, 동위원회는 이 선거에서 선거부정 사실과 친일파들이 민선의원에 선출되었음을 지적하였고, 특히 서울과 강원지역 입법의원 선거에 부정이 있었음을 적발하였다. 민선의원 선거는 일제 때 도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에 따라 다액납세자와 지주들만이 선거권을 갖게 하는 등 비민주적으로 진행되었고, 당시 18세 이상이 투표권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가장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선동의 혐의로 감옥에 보내졌다. 일찍이 좌익계에서는 전면적으로 선거를 거부한 데다 선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투표율은 매우 저조하였다. 민선의원에는 한민당(한국민주당)과 이승만계열의 극우인물들이 당선되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천한 관선의원 중에서 선정된 여운형·조완구·장건상·엄항섭 등은 취임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 아무튼 많은 진통을 겪고 과도입법의원이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비민주적 선거라는 비판을 받는 등 출발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김규식은 마크 게인(Mark Gain)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선거는 사기(詐欺)이며 모든 좌익지도자들이 감옥에 있는 한 공정한 선거란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입법의원 선거가 완전히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실시되었고 서울·강원도·대구·부산 등지에서 당선된 의원 가운데 친일파가 많이 끼여 있으며 두 달 전에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 공평한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러치 군정장관에게 권고하였으나 무시되었다고 격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분노와는 달리 미군정은 친일파 문제가 민족문제로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설혹 민족 감정을 헤아리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미군정으로서는 그것이 그들의 정책에 반할 때에는 군사정책에 입각한 미국의 국익과 편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 간에 극우·극좌의 대립을 첨예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세력은 좌·우측 모두의 공격을 받으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였고 입법의원 선거에 임하였다. 김규식도 미군정이 입법의원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을까 회의하면서 처음에는 입법의원 선거에 불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규식에게 민정이양을 굳게 약속하고 선거에 출마하도록 설득하였다. 김규식은 당시 정세로서는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입법의원 구성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의 약속을 믿어보고자 했다. 이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년 12월 11일 열린 입법의원 예비회의에 53명이 참석하였는데, 김규식은 49명의 동의를 얻어 입법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튿날 개원식에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취임사로써 민족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 

  이 초법적 입법의원의 사명은 최속(最速)한 기간 내에 남·북이 통일한 총선거식으로 피선된 확대된 입법의원을 산출하는 제1계단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고, 그 확대 입법의원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계속 개회가 되면은 더욱 좋거니와 혹 어떠한 변환으로 급히 속개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간 내에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위한 우리의 임시정부를 산출하여 안으로는 완전 자주 독립의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우리의 주인인 한국 3천만 민중의 복리를 도모할 것이며 밖으로는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여 동아 및 전 세계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모든 민주주의 연합국과 협력 매진할 것이다. 본의원의 성능에 있어서 현금 정세의 관계로 재한미주둔군 군사령장관 지배하에 있는 미군정청 제118호 법령으로 신설되는 것이지마는 이 의원이 결코 미주둔군사령관이나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행사할 것은 아니며 또 미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자면 남에 있는 미군정이나 그 존재를 단축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우리의 일은 우리의 손으로 하며 우리에게 대한 법령 제정도 우리의 손으로 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로서 자정하자는데 매진할 것이다.

  김규식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 열망을 강조하고 입법의원을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입법의원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구하고 하루빨리 남북통일임시정부수립을 위해서 공동분투하자는 편지를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전문으로 발송하였다.
  

 그런데 좌우합작위원회 출신의 관선의원과 한민당(한국민주당) 출신의 민선의원들은 사사건건 대립하는 형국을 보여주었다. 1947년 5월초 김규식·여운형 등은 조병옥·장택상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거듭 미군정청내의 한국인 관리들의 비리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5월 12일 입법의원에서는 친일파·민족반역자 등에 대한 처단은 민족적 명제라고 언명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줄 것을 의원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7월 20일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입법의원을 통과했지만 미군정과 한민당(한국민주당)의 반대로 공포되지 않았다. 특히 오랫동안 「입법의원 선거법안」을 놓고 민선의원과 관선의원은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민선의원은 선거권자와 피선거권자의 연령을 각각 25세 이상, 30세 이상으로 하자는 안을 내었고 관선의원 측은 각각 20세 이상, 25세 이상으로 하자는 안을 내었다. 민선 측에서는 오랜 일제지배 밑에서 정치에 참여치 못했기 때문에 무경험하고 무의식한 청년층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이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선 측의 주장에 대해 관선의원 측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과도적 중요한 시기에 있어서는 청년층이 주도적 역할을 해왔으며 또한 일제의 몽매 정치 밑에서 대부분이 무지몽매한 가운데에서나마 비교적 20대의 청년들의 지적 수준이 가장 높다고 볼 때 앞뒤가 모순되는 법안은 대국적으로 유감스러운 결정이라고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표결 결과 민선의원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의장인 김규식은 “백만 청년을 제외하려고 하는 비민주적 처사는 언어도단이다. 다음 세대에 누를 끼칠,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의장과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라는 내용의 사표를 제출하였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민선의원측은 23세 이상과 25세 이상의 절충안을 내어 이것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김규식도 사의 표명을 철회하였다.
  

 입법의원은 본래 설치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이를 지켜보는 김규식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극우·극좌 진영의 모두에게 공격 대상이 되어 김규식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가 계속 전달되고 있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김규식은 자택에서 나와 여러 곳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더욱이 김규식을 실망시킨 것은 과도입법 의원이 국회의 성격을 띠고 민주주의적 대의기구로서 출발하였는데도 여기서 제정한 법령은 미군정장관의 인준을 받은 경우에 한해서만 효력을 발생하였고, 무엇보다도 입법의원 안이 단정(단독정부)세력과 비단정(단독정부)세력의 대결장이 되어버린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미·소(미국·러시아) 양측의 교섭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 휴회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재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동위원회 측에 “미·소(미국·러시아) 양대국간에 사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배제하고 급속한 기한 내에 우리로 하여금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전력 매진하도록 해 줄 것”과 “우리는 좌우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호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 겨레가 한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미소공동위(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노력하고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위원회 등의 중도파 세력 김규식·여운형·안재홍·홍명희·정구영 등 1백 여 명은 1947년 6월 15일 「시국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종교단체와 노동단체 등 사회의 각계각층이 망라된 것이었다. 그들은 범국민세력을 조성하여 본격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한편 우익진영은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의견이 분열되었다. 일부 정당에서는 사이비 단체를 만들어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대상에 등장시키기도 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좌익의 여운형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여운형은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서울을 떠날 채비를 하였으나 미처 서울을 떠나기 전 7월 19일에 우익청년 한지근에게 피습당하여 사망하였다. 정권획득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류들과는 달리, 순수한 열정과 애국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김규식과는 오랫동안 공동보조를 맞추어 왔던 합작위원회 좌측 주석이며 근로인민당 당수인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 여운형의 사망은 김규식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던 김규식을 중심한 중도세력들은 시종 민족의 자주노선을 지향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민주주의독립전선·시국대책협의회·좌우합작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1947년 10월 1일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김규식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제1·2차 준비회의를 거쳐 12월 20일에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 개인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강당에서 드디어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김규식은 “금일의 조선내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 독재사회도 건립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극우·극좌의 편협한 노선 모두를 배제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미·소(미국·러시아) 양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른 정책만을 고집하여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 맡기려 하였다. 김규식은 국제연합의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통일정부 수립은 한민족의 자주적인 운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미국·러시아) 양국 사이에서 대립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민족적인 차원에서 단결하여 뒤엉킨 민족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남북의 지도자가 회담을 가져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한반도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중도파 세력들이 고심하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이들 중도통일세력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7년 3월 10일 모스크바 4국 외상회의에서 미국무차관보 존 힐드링(John H. Hildring)은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다. 조선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과의 사이에 행한 교섭은 절망상태인 즉 미국은 그 점령지역 안에서 독자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발언하여 더 이상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의존하지 않고 한반도문제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한편 미대통령 트루먼은 공산침략에 직면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하여 군사 및 경제원조를 할 것이라고 밝히고 “미국은 전체주의의 직접 및 간접 침략으로부터 자유 국가나 제도를 수호할 것”이라는 트루먼독트린(1947)을 발표하였다. 이후 세계의 정세는 미·소(미국·러시아) 공존체제에서 냉전체제로 점차 변화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가 결렬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스크바삼상회(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에 의한 한반도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소련과의 대화를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고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미국에 의해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1947년 10월 19일에 유엔총회 전체회의가 개막되었다.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 엉켜진 실타래처럼 복잡한 한국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김규식과 김구는 처음에는 이를 환영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남북통일 총선거, 38선 철회, 통일정부 수립, 그리고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수라는 단계를 밟을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그런데 소련은 미·소(미국·러시아)군 동시철병안을 내었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미국은 한국독립촉진결의안을 내었으나 소련 측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자주연맹 계열은 미·소(미국·러시아) 공동철병안이나 신탁통치 없는 한국독립안 모두가 한민족의 자치 능력이 반영된 것이므로 일단 환영하고, 남북인민대표자의 자유왕래와 총선거 기구의 설치 및 통일적 치안대의 편성 등을 주장하였으며 남북요인회담과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에서 미국측 안인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은 한국 독립과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이 압도적 찬성을 얻어 가결됨으로써 한국의 운명은 외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유엔은 9개국으로 이루어진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들은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주둔 소련군은 위원회가 북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남한에 파견된 유엔한국위원회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들과 협의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이 위원회와 협의할 수 있는 민선대표단을 구성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에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군정에 후원을 받는 중간파에 의하여 공산분자가 다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수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고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 발언에서 김구는 그간 반탁이라는 입장에서 이승만 계열과 입장을 같이 하였지만 남한단독선거 주장의 이승만 계열과 결렬하고 김규식과 입장을 같이 함을 보여주었다. 김규식과 유엔임시한국위원회와의 협의는 1월 27일에 이루어졌는데,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 조선은 역사적으로 남북이 분할된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단정[單政(단독정부)]이란 말은 모른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중앙정부는 있으나 단정(단독정부)의 정부 행세하는 일은 없다. 38선은 미·소(미국·러시아) 양국에서 만든 것이지 한인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38선 경계는 결자해지(結者解之)로, 만든 자가 제거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금은 유엔총회에서 한국독립 문제와 자유 획득 문제를 책임지고 있으므로 이 38선의 제거도 유엔총회에서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제17장 남북협상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가지고 찬·반의 양편에 섰던 김규식과 김구는 단독정부 반대운동에서 하나로 일치하게 되었다.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한반도에서 외세를 배격하는 것으로, 단독선거를 치러 남·북한에 각각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다면 이는 결국 남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소(미국·러시아) 양국에 예속되는 길이라고 두 지도자는 생각하였다. 그들은 미소공동위원회, 유엔 등 외세에 의해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통탄하고 주체적인 통일의 길을 찾기 위해서 남북협상을 구상하게 되었다.
  

 김규식과 김구가 남북협상을 모색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거나 혹은, 정치협상을 벌여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절대독립을 위한 투쟁, 혹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족의 분열을 막고 민족이 생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김구는 “공산주의자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자를 불문하고 외각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도덕을 가진 조선민족이지 이색민족이 아니므로, 이러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여 동족과 친히 좌석을 같이하여 여하한 외부의 음모와 모략이라도 이것을 분쇄하고 우리의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아니되겠다.”고 하였다. 김구는 2월 10일에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고 호소하였다.
  김규식과 김구는 영국과 소련의 외교 통로를 통해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1948년 2월 16일자로 편지를 보냈다. 양 김씨가 보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민족의 생존과 멸망을 결정하며 국토의 영원 분열과 완전 통일을 판가름하려 하는 최후의 순간에 수수방관할 수 없다.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3. 남·북 정치지도자간에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에 관한 방안을 논의하자.
  4. 북쪽에 계시는 여러 지도자들도 동일한 의향을 가질 줄 믿는데, 우선 남쪽에 있어서 남북정치협상을 찬성하는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

  이와 같은 요지의 서한을 보냈으나 평양에서는 오랫동안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2월 19일 서상영·신익희 등 43명의 입법의원이 과도입법의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유엔한국위원단에 요청하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하자 김규식 등 중도파 의원들이 퇴장하였고 김규식은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에 열린 유엔소총회에서는 가능한 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정하였다. 김규식은 이 소식을 듣고 민족자주연맹의 주석자리에서 물러나 일체의 정치 행동을 중지하고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였다. 과로와 병으로 약해진 심신을 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민족과 국토가 분단될 위기에서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조국에 마지막으로 헌신한다는 각오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미군정은 3월 1일 남한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김규식은 3월 11일 김구·조소앙·조완구·조성환 등 임시정부 동지들과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그리고 유교 대표인 김창숙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7인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소련이나 미국의 정책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면서, 남북이 분단됨으로써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미국·러시아)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라고 예견하고, 이제 우리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며 남한단독정부 수립 선거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도 민족 앞에 맹세하였다.
  

 기다리던 북한 측의 회답은 3월 15일에 평양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여기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한독당(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 등 17개 정당·사회단체를 단체대표단연석회담에 초청하고 김규식과 김구 앞으로는 서한을 보내왔다. 이는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를 반대하며 4월 초에 연석회의를 소집할 것을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김규식과 김구는 1948년 4월 3일에 이승만과 한민당(한국민주당) 계열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단독정부 반대운동의 중심체로서 한독당(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을 기간으로 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이데올로기보다 민족문제를 중시하는 세력들이 다시 연합한 것이다. 필동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결성식에서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북회담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리고 근근(近近) 연락원을 2~3명 보낼 예정이다. 남북회담이 성공하리라고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
  

 북한 측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기가 쉽다. 이러한 때에는 우리 강토를 차라리 황해 바다에 집어넣는 것이 좋다. 그러니 이번 회담의 희망은 매우 박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모든 희생을 잘 알고 각오하고 가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소련이 피흘리지 않고 우리 강토를 소연방에 넣으려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한단정(단독정부)은 이 위태한 한국의 남북을 영원히 분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한편 미·소(미국·러시아) 양군 즉시 철퇴라는 원칙을 반대할 자 있겠느냐? 그렇지만 그 뒤가 무서우니 우리는 우선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이 철퇴에 관하여 협정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남북회담이 실패된 후 누가 다시 미국이나 소련을 믿을 것인가? 그러니 우리의 길은 지금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가 흥하는 것도 우리가 흥하게 할 것이고, 우리가 망하는 것도 우리가 망하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보면 김규식은 남북회담의 성공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 민족의 운명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고 판단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남북회담에 임한 것이다. 김규식과 김구는 북한으로 가기에 앞서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들은 4월 7일에 출발하여 삼일 만에 돌아왔다. 북한에서는 “두 분 선생이 무조건 이쪽으로 넘어오셔서 우리들과 상의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라고 한 전언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김구는 곧바로 북행을 결정하고 19일에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김규식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남북회담이 미·소(미국·러시아) 양쪽의 어느 정치체제에 구애되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민족이 나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결실될 것인가도 회의하고 있었다. 이에 김규식은 신중을 기하여 북행에 앞서 북측에 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수리할 경우 협상에 응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5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이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퇴는 양 군당국이 조건·방법·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김규식의 이러한 제안은 북한과의 협상에 앞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합의점에서 출발해야만 용이하게 협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북한 측에 전달되었고 북한에서 이를 수락한다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문화인 108명이 남북협상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김규식은 더욱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김규식은 4월 21일 서울을 떠나 22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규식과 김구가 도착하기 전인 4월 19일부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연석회의는 북한 측의 일방적인 진행으로, 모든 결정이 공산당 측의 독선으로 이루어졌다. 북한 공산당 측은, 민족단합에 관심이 없었던 극우세력이 그러하였듯이, 민족통일의 문제보다는 극좌적인 노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였다. 김규식은 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회의가 끝난 후 남한대표를 환영하는 초대연에서 김규식은 “우리는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라는 요지의 답사를 하였다. 앞으로 열릴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회의」에서 남북한이 「우리」로서 단결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김규식과 김구는 평양에 머문 4월 19일부터 5월 4일까지 3번의 회담을 가졌다. 4월 30일 김규식과 김구·허헌·박헌영 등 11명의 남쪽대표와 김일성·김두봉 등 북한의 대표가 참가하여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채택하였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전취(戰取)할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좌기 제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입법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공동성명서는 김규식과 김구가 남북협상 제의 후에 일관되게 주장했던 통일독립정부수립안이며 또한 그 실천과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4월 26일에는 김규식·김구·김일성·김두봉의 이른바 「4김회담」이 열렸다. 김규식은 이 자리에서 남한측 대표들은 협상하러 평양에 온 것이기 때문에 진지한 토의가 있어야겠다고 말하였다. 자신은 남한 단선(단독선거)에는 반대하나 이 문제는 연석회의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공산당은 선거반대만을 연석회의에서 일삼을 것이 아니라 협상할 수 있는 일은 협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규식은 우편물의 교환이나 남한에 대한 전기의 계속적인 공급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북한 측은 계속하여 남한에 전기를 공급할 것과 연백 수리조합을 개방하여 38선으로 말미암아 농수(農水)를 받지 못했던 연백평야에 물을 공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평양에서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 회의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일치하였고, 북조선 당국자들도 단독정부를 절대로 수립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받았다고 밝히고,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새로운 발전이며 우리에게 커다란 서광을 주는 것이라고 밝히었다. 이처럼 김규식과 김구는 해방되어 돌아온 조국이 결코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일본 대신 미국과 소련에 재점령되었음을 통감하고 미·소(미국·러시아) 양 군을 한반도에서 철퇴시켜 한국민의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자하는 의지를 남북협상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의 투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김규식은 떠나기 전 북한 측을 불신임하던 자세를 고쳐 신임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김규식은 북한 역시 소련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바는 아니나 미군정하의 남한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친일파문제, 토지문제에서 민족적인 모순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민족적인 감정은 어느 정도 북한 측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이러한 신뢰의 바탕을 갖고 협상에 임한다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남북협상에서 합의한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수문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자 북한은 김두봉이 소련점령군 사령관에게, 남한에서는 여운형 등이 미점령군 사령관에게 협의안을 전달하였다. 미사령관 하지는 이에 대해 “유엔의 결의안에는 전조선에 걸쳐 총선거를 실시한 후 한국국민정부가 수립되면 가급적 속히 양군이 철퇴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하여 정부수립 후의 철군안을 고집하였고, 소사령관 코로트코프는 “소련정부는 조선으로부터 미군대가 동시에 철퇴한다면 조선에서 소련군대는 즉시 철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하여 양군 동시철수안을 주장하였다. 북한은 일단 북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유보하였으나 남한은 남북협상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5월 10일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에 남북협상의 주도세력인 한독당(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은 통일정부가 아닌 그 어떤 정부에 의 참여도 거부하여 선거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선거를 방해하고 반대하는 소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5·10선거(5·10 총선거, 1948)는 실시되었다. 948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198명이 선출되었는데, 당선된 다수가 한민당(한국민주당)과 독립촉성계열의 인물들이었다. 5·10선거(5·10 총선거, 1948)가 실시된 이틀 후 12일에 북한 측은 전기의 공급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하고 14일에 전기를 단전해 버렸다. 그리고 해주에서 다시 제2차 남북협상을 열 것을 제의해 왔다. 이에 김규식과 김구는 북에 머물고 있는 홍명희를 서울로 오게 해서 남북회담에 앞서 미리 의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고 남한의 국회를 불법적 조직체로 규탄하고 북한만의 선거에 의해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제2차 남북회담을 제의하였다. 남북회담 제의의 목적이 북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동의를 얻고자 하는 데 있음을 안 양 김씨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김규식과 김구는 7월 19일자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인민공화국의 선포와 국기의 제정에 대해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이라고 규정하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어떻게든지 통일정부를 수렁하고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퇴를 실행하고자 했던 김규식과 김구의 노력은 남한의 5·10선거(5·10 총선거, 1948)로 인해 협상의 발판을 잃어버렸고 북한에서의 또 하나의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서 7월 20일에 압도적 다수로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 수립운동은 계속되어 다음 날인 7월 21일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을 집결하고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기하여 민족 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한다는 등의 강령으로 한독당(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근민당(근로인민당)·근로대중당·민주한독당·신진당·청우당·보국당·민중동맹 등이 참가하여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이 촉진회(통일독립촉진회)의 회장에는 김구가, 김규식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규식은 동회에서 파견하는 파리 유엔총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한의 이승만·김일성 모두의 단독정권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다시 토론할 때 어떤 한인이든지 자유의사로 말하라면 반쪽 조국 위에 세워진 정부를 자기의 통일정부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그 정부가 자기들의 행복을 줄 것이라고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며, 통일독립촉진회의의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가하여 발언할 수 있게 할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유엔에 보냈다. 당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는 정부만이 유엔 한국위원단을 상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김규식과 김구는 유엔한국위원단을 상대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을 다시 시작하고자 운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열기는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됨으로써 냉각되었다. 민족의 양심들은 한 두 사람씩 총탄에 희생되는 상황에서 김규식이 홀로 민족자주연맹을 이끌어 가기에는 이미 힘이 분산되고 소진되어 버렸다.
  

 1950년 5월 30일에 제2차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 김규식의 주변 인물들은 김규식에게 정계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제 분단이 기정사실이 된 현실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적 신념을 펼쳐 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 어떤 단독정부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혹자는 김규식이 선거에 참여하고 그를 중심한 중도 세력들이 힘을 집중했더라면 남한의 정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규식이 자신의 신념을 꺾고 단독정부에 참여하기에는 그의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은 분단국가의 성립으로 실패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우리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서 명맥이 이어져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이 운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이룩해야 할 민족적인 과업인 것이다.


제18장 6·25의 발발과 생의 마감

  전후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소련은 힘의 대결을 택하여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여기에 민족의 분단과 국토의 분열을 막아보고자 기울였던 민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정치세력들은 민족이라는 전체의 이익과 발전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권력확대에 치중하여 남북한의 분단은 고정되었다. 오랜 동안 식민치하에 있으면서 열망해 왔던 민족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정은 남북한이 모두 뜨거웠다. 그러나 남북한은 서로가 민족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이러한 민족적 열망과는 달리 경쟁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북진론을, 김일성은 민주기지론을 주장하면서 서로가 무력통일을 공언하였다. 끝내는 남북한이 정면으로 대결하였고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은 한편의 시나리오처럼 터지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6·25전쟁, 한국전쟁, 1950)이 발발한 것이다. 김규식은 남북회담이 결렬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중 6·25의 변(6·25전쟁, 한국전쟁, 1950)을 당하였다. 인민군에 의하여 서울이 점령당하였을 때 김규식과 그의 가족들은 민규식이 제공한 삼청동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이 집을 공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요구해 와 잠시 계동으로 이사하였다가 어느 독지가의 호의로 원서동에 있는 한 한옥으로 다시 이사하였다. 1950년 9월 17일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서울 시청에서 무슨 회합이 있으니 모두 집합하라는 통지를 보내자 이튿날 김규식과 최동오·송호동·김진우·권태양·송남헌·신상봉 등 측근들이 모여 심의한 결과, 그 회합이 요인들은 납치하고자 하는 회합임을 예견하고 피신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피난을 가기 전인 오전 11시경에 이승엽이 주재하는 “평화옹호대회에 참석하시도록 모시러 왔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비서 신봉승과 함께 집을 나섰다.[1980년 중반에 남한으로 망명해 온 전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申敬完) 씨는 북한 노동당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납북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가는 일에 동행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 바 있다. 그의 기록과 증언이 공개되면서 김규식을 비롯한 납북인사들의 최후가 알려졌다. 따라서 김규식의 납북당시 상황과 사망하기까지의 사실은 신경완 씨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태호저, 1991, 다섯수레)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다.]

  납북인사들은 대개 4차로 나누어져 각기 군트럭을 타고 미군기의 폭격을 피해 밤길에 북행하였다. 연행된 인사들 중 김규식·조소앙·안재홍 등 연로한 인사와 건강이 안 좋은 인사들은 일단 북행하지 않고 성북동 안가(安家)와 성남호텔 등에 연금되었다. 김규식·조소앙·조완구·김붕준·윤기섭·유동열·최동오 등 임정요인을 비롯하여 오하영·안재홍·정광호·이강우·장덕로·장연송·오정방·원세훈·김헌식·권태양·김홍곤·안우생·권태희·방응모 등 일행이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9월 27일 저녁으로 군트럭에 나누어 타고 성북동-삼선교 고개-종로-수색을 거쳐 일산·문산을 지나 임진강을 건넜다. 쉴 새 없이 달려와 28일 송악산에 도착하여 하루를 방공호 속에서 보내고 밤 9시가 되어 다시 황해도 금천을 향하여 북진하였다. 납북인사들은 평산을 벗어나자마자 여러 차례 집중 공습을 받았다. 이 공습으로 방응모·김붕준이 숨지고 여러 사람이 다쳤다. 29일 밤 봉산을 떠나 사리원·황주를 거쳐 여러 차례 비행기 폭격을 받으면서 10월 2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0월 10일 연합군의 평양 대공습으로 평양시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절대로 갈 수 없다고 항거하는 납북인사들은 반강제로 차에 실려 12일 밤에 다시 북행하였다. 평안남도 개천을 향할 때 또 한차례 공습을 받아 두 명의 인사들이 부상을 당하였고 김규식과 유동열은 병세가 악화되어 기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차마저 폭격으로 불타버리자 개천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자 조를 짜서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으면서 행군하였다. 김규식과 유동열은 젊은 수행원과 경비병들의 등에 업혀 갔다. 일행은 높은 산과 고개를 넘어 수많은 개울과 도랑을 건너는 힘든 행군 끝에 10월 18일 새벽녘에 희천 부군에 이르렀다. 유동열은 희천까지 오는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의식마저 잃었는데 급기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18일 낮에 김규식·조소앙·조완구·최동오 등 오랜 세월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였다.
  

 일행은 유동열의 장례를 치른 후 희천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전천으로 가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화물열차를 타고 강계를 향해 떠나 10월 19일 이른 새벽에야 도착하였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인솔자인 김관섭을 따라 강계 시내로 들어왔다. 강계는 피난민들과 전선에서 부상당한 이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행은 기진이 다 쇠잔해졌고 특히 김규식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돼 위독상태였다. 조소앙 등은 관계자들을 만나 김규식을 병원에 입원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무시되었다. 며칠동얀 강계의 한 일본식 사택에서 보내고 10월 23일 밤에 다시 강계역을 떠나 압록강가 최북단의 만포선 종착역에 도착하여 여기에서 다시 산악지대로 훨씬 들어간 작은 산골 마을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한참을 묵다가 만포시 방면 별오동(別午洞) 부근의 산골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앞서 납북된 인사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김규식을 비롯해 조소앙·안재홍·오하영·윤기섭·송호성·엄항섭·최동오·정광호·장연송·장덕로·이강우·원세훈·명제세·김약수·신석빈·박철규·김효석·김용무 등 40여 명이었다.
  

 그간 동지들의 끈질긴 입원 요구 끝에 김규식은 11월 하순경에 만포 근처의 군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했으나 그의 병세는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김규식은 납북이전부터 심장병·위장병·불면증 등으로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는 등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는데 무리하게 진행된 북행과 천식의 악화로 거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여 그의 심신은 더 이상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였다. 12월 초 병세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지들은 김규식이 입원한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김규식은 기침 때문에 밥은커녕 미음조차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하여 앙상하게 뼈를 드러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문병간 동지들은 좁은 방안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병이 빨리 나아 돌아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와야만 했다. 김규식 곁에는 권태양과 김용관이 남아 그를 돌보았다.
  

 그는 때때로 기력이 회복되면 권태양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라의 통일도 못해 놓고 이렇게 눕게 되었으니…”라 말을 몇 번씩 번복하였다. 그는 또 “내 나이 70이지만 나라를 통일시켜 놓고 기뻐하는 남북 겨레들의 얼굴을 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으련만” 하면서 비감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권태양에게 유언처럼 들려주었다.

  “내가 살아온 생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한 걸음 한 발자국을 걷고 옮길 때도 언제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갈라진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합작과 통일을 주장해 왔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기필코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신념이자 의지였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쓰러지면 조국통일의 완성은 누가 해줄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해. 남도 북도 같은 민족이고 좌익도 우익도 같은 민족이다. 조상과 핏줄이 하나인 민족이 왜 통일을 할 수 없겠는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꼭 해야 한다는 의지와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념과 책임감을 통감하고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인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일부 지도자들의 개인정권욕에 의해서 통일도 못하고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형제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하는 이 참극을 가져오게 했다. 생각할수록 비분을 금할 수 없다.”
  

 김규식은 혼수상태 속에서도 ‘조국’·‘통일’이라는 두 마디 말을 자주 되뇌었다 한다. 12월 10일 김규식은 오랜만에 안정을 찾은 듯 싶었다. 간병하고 있던 권태영과 김용관도 안심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려 간 사이 초저녁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김규식은 유언을 하려는 듯 권태양과 김용관을 찾다가 밤중에 말없이 잠드는 듯 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운동 했던 김규식이 말년에 가족들과 헤어진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숨을 거두면서 이상과 신념에 따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 바쳐온 자신의 일생을 만족하게 회상하였을 것이다.
  

 김규식은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12월 12일 만포진 부근 야산에 묻히었다. 북한당국은 1970년대 말 김규식의 묘를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능으로 이장하였다.


제19장 끝으로…

  일제는 1921년 김규식에 대한 보고에서 ‘친러·친미·친중, 그리고 부분적 폭동을 주장한다.’라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김규식에 관한 인물 평가는 달리 해석하면 어떤 강대국에도 치우치지 않는 행동가인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광복 이후에도 김규식은 극한으로 대립된 친미반소, 친소반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서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우선으로 한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즉 그는 민족자강의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한 자주적 한국인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파악하는 뛰어난 판단력과 분석력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어떠한 주의·노선보다 민족의 통합과 통일이 우선한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선상에서는 사상과 노선을 초월하여 민족의 화합과 대동단결을 추구하여 좌·우합작을 주도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통일조국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분단된 남북의 협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변에 얽힌 국제적 이해와 민족내부의 노선간의 갈등으로 김규식의 이상과 능력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김규식의 활동은 언제나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그리고 결국 최선의 길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 고뇌가 따랐다 그러나 한번 선택된 길을 실천할 때의 김규식의 정열과 노력은 언제나 진중하였다.
  

 김규식의 생애를 통해 보여준 그의 희망과 좌절은 우리 민족운동의 배경과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독립운동사와 해방정국의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자신의 이해와 기반을 중시하는 부르주아적 성향에서 벗어나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이 서면 민족적 입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시대의 양심이었던 그의 고민은 우리 민족에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당면한 현실 문제로 다가온 민족 통일의 시대에서 김규식이 지향했던 목표는 합리적 민주주의의 길이 되어야 할 통일 조국을 전망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규식의 정신은 냉전주의적 반공체제 아래서 그 존재가 잊혀져왔다. 편향적 이데올로기는 김규식이 좌·우합작을 전개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한 주체세력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기피하는 괴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의 독립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공적은 1989년 8월 15일에 와서야 건국공로훈장 중장에 추서되면서 비로소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연보

1881. 2.28(1세)  경남 동래(東萊)에서 출생
1882. 5.22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3. 6.15  동래부에서 민란 발발
1883. 7.25  한일통상장정 해관세칙 일본인어채범죄조규 일본인간행리정 조약(日本人間行里程條約) 조인
1883. 9.19  인천·부산·원산에 해관사무를 위한 감리(監理)를 둠
1883. 10. 8  일본공사,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와 비밀교섭하여 인천·부산·원산 등지의 해관세 수세업무를 일본 제일은행 각지점에 위탁하는 계약체결
1883. 11.26  한영수호통상조약 및 한독수호통상조약 조인
1884. 6. 26  한이(伊)수호통상조약 조인
1884. 7.7  한로(露)수호통상조약 조인
1884. 12.4  갑신정변(甲申政變) 일어남
1885. 4. 5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아펜젤러, 제물포에 도착
1886. 5.11  언더우드, 고아학교 설립
1887. (7세)  언더우드 목사 댁에 입양(고아학교에서 수업)
1890.  부친 사망
1896. 4. 7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에서 활약
1897. (17세)  미국 유학(가을 학기부터 버지니아주 로녹대학 예과에 입학)
1897. 11.12  언더우드, 최초의 교회 설립(현 새문안교회)
1898. 6.  로녹대학 예과 준우등으로 졸업
1902.  영일동맹 체결
1903. 6.  로녹대학 졸업
1904. 2.23  한일의정서 조인. 미국에서 귀국. 러일전쟁 발발
1904~1913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근무, YMCA 학생부 교사 및 담당간사, 경신학교 학감으로 근무, 새문안교회 새예배당 건립에 진력
1905. 8  포츠머스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서울을 출발, 상해까지 이르렀으나 회의 종결로 귀국
1905. 11.  을사5조약(을사늑약) 체결, 「종교에 관한 규칙」발포
1906. 5.21(26세)  조은수와 새문안교회에서 결혼
1907.  도쿄 세계학생기독교연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1910. 5.29  새문안교회 헌당식, 건축위원회위원으로 선정
1910. 8.22  한일합방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조인
1910. 12.18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 장남 진필(김진필) 출생(6개월 후 사망)
1911. 9~1912. 3  105인 사건
1911. 10.10 중국 신해혁명 성공
1911. 12.  경기·충청노회 서기로 임명
1912. 2. 1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피선, 차남 진동(김진동) 출생
1913. 4. (33세)  중국 상해로 망명
1913. 12.17  상해 박달학원 설립, 영어교수
1914. 7.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6.  앤더슨 마이어회사에 입사, 장가구에서 근무
1917. 7.  대동단결선언에 참가
1917. 11. 7  러시아혁명 성공, 소비에트정권 수립 선언
1917. 12. 전러한족회중앙총회 조직, 부인 조은수 여사 폐병으로 사망
1918. 1. 8  미국 윌슨대통령 14개조항 선포
1918. 3.  앤더슨마이어회사 몽골 고린(울란바토르) 지점으로 부임.
1918. 8.  신한혁명당 조직
1918. 11.  세계1차대전(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미국 찰스 크레인이 중국을 방문하여 파리강화회의 중요성 강조, 여운형과 면담
1919. 1.28(39세)  파리강화회의 개최, 김순애 여사와 재혼
1919. 2. 1  상해에서 파리로 출발 (3.13 파리 도착)
1919. 4.  파리 한국공보국·통신국 병설
1919. 4.13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주파리 대표위원으로 피선
1919. 5.10 「한국민족의 일본민족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 및 「한국민족의 주장」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
1919. 6.28  파리강화회의 폐회
1919. 7.28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 한·중(한국·중국) 문제 연설회 주최
1919. 8. 8  미국으로 향발
1919. 8.25  미주 한국위원회 발족, 9월에 구미위원부로 개편, 김규식, 구미위원부위원장으로 임명. 미국에서 뇌종양 수술
1919. 9. 6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피선
1920. 2.  임시정부 학무총장 겸 외교위원으로 임명
1921. 1. (41세)  상해로 돌아옴
1921. 5.19  국민대표회의 기성회 촉성회 조직, 조직위원으로 선출
1921. 5.  중한국민호조사 창설
1921. 11.  동방피압박민족대회 참가차 상해출발, 장가구-몽고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이르쿠츠크에 도착, 자유시참변사건 재판 목격
1922. 1. 7  극동인민노력자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 개최지인 모스크바에 도착. 각국 대표 144명 중 한국대표 52명 참가, 여운형과 함께 대표자로 피선(1.21)
1922. 5.17  상해 도착
1922. 10. 1  제일학교 설립
1923. 1. 3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3. 8.20  창조파를 이끌고 노령(러시아령)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감
1923. 9.17  남화학원 설립
1924. 4.  상해로 돌아옴. 복단대학·동방대학에서 영문학 강의, 로녹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
1924. 9. 15  상해 고등보습학원 설립
1927. 7. 5  『연합』지에 영국과 미국을 배척하는 기사 투고, 체포명이 내려짐
1927.  천진으로 이사, 북양대학 교수(1929년까지)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직, 회장으로 추대, 『동방민족』발간
1928. 3남 진세(김진세) 출생
1930. 8. 4  임시정부 학무장에 피임
1932. 4.29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
1932. 7.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준비위 구성
1932. 9.18  만주사변 발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1935.10까지 재임) 남경 중앙정치학원 교수
1932. 11.10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중한연합회 조직
1933. 1초(53세)  중한민중통일동맹 대표로 도미, 각지 순회 연설
1933. 4. 5  미국 부락베스트구루노류우대학에서 강연
8. 중국으로 돌아옴
1934. 1.20  임시정부 외무장에 피임
1934. 3. 5  대일전선통일동맹 대표, 대동단결조직 방침안을 결의
1934. 4.22  대일전선통일동맹 해체 결의
1935. 7. 5  민족혁명당 창설, 제1차 중앙집행위원, 규칙 제정위원에 선출, 국민부 부장에 임명
1936.  사천대학에서 영문학 강의
1937. 7. 7  중일전쟁 발발
1937. 11.12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1938. 10.  조선의용대 편성
1939. 5.  김구·김원봉 연합전선 결성 합의
1941. 1.10(61세)  민족혁명당 임시의정원 피선 실시
1941. 12.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
1942. 7.  조선의용대 재중경지대, 광복군 제1지대 편입
1942. 10.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 선전부장 피임
1944. 4.20  임시정부 부주석에 피임
1945. 8.15(65세)  해방
1945. 11.23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
1945. 12.27  모스크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 발표, 반탁운동 전개
1946. 2.14(66세) 재남조선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구성, 부의장에 취임
1946. 3.20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 4.18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1946. 5.25  여운형과 접촉, 좌우합작 준비
1946. 6. 3  이승만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 역설
1946. 6.14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
1946. 7.13  좌·우합작 제1차회담
1946. 7.25  좌·우합작 제2차회담
1946. 7.26  민주주의 민족전선 좌·우합작 5원칙 천명
1946. 7.29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창설. 좌·우합작 8원칙 발표
1946. 8.24  미군정, 과도입법의원에 관한 법령 발표
1946. 9.23  좌익의 공산당·인민당·신민당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조직
1946. 10. 1  대구 폭동(대구 10·1 항쟁)
1946. 10. 4  좌·우합작 7원칙 발표. 여운형 납치
1946. 10. 9  원세훈 등 270여 명 한민당(한국민주당) 탈퇴
1946. 10.23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설치
1946. 12. 4  여운형 정계 은퇴 성명 발표
1946. 12.11  입법의원 예비회의에서 입법의원의장에 선출
1946. 12.12  입법의원 개원 (1948년 5월 20일까지 219차 회의)
1947. 7.19  여운형 피살
1947. 8.  민족통일재편성 준비회 조직
1947. 9.  한국통일안 유엔 이첩
1947. 11.14  유엔총회, 유엔한국위원단 설치안 채택
1947. 12.15  좌우합작위원회 해체 선언
1947. 12.20  민족자주연맹 결성, 주석으로 추대
1948. 1.23(68세)  유엔 한국위원단, 북한 입경 거부됨
1948. 1.27  유엔 한국위원단과 접견하여 남북협상의 용의 있음을 시사함
1948. 2.16  김구와 함께 김일성·김두봉에게 서한 발송
1948. 2.19  입법의원 의장직 사임
1948. 2.26  유엔소총회,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 결의
1948. 3.12  「7거두성명」을 발표, 단독선거 반대 천명
1948. 3.15  북한 측이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대표 연석회의 제의
1948. 3.27  김일성·김두봉 회답 도착
1948. 4. 3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식에서 남한단독정부 반대 이유와 남북협상 참가를 천명하는 연설
1948. 4. 8  문화인 108명 남북협상 지지 성명. 김구, 평양으로 출발
1948. 4.22  김규식, 평양 도착
1948. 4.30  4김(김규식·김구·김일성·김두봉)회담
1948. 5. 6  양 김씨 서울도착, 성명
1948. 5.10  남한지역에서 선거 실시
1948. 5.12  북한에서 남한에 단전·단수 단행
1948. 5.14  북한에서 제2차 남북협상을 제의하였으나 양 김씨 거부
1948. 6.29  평양에서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개최
1948. 7.10  북한, 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 실시를 발표(8월 25일 실시)
1948. 7.21  양 김씨를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성회 결성
1950. 5.(70세)  총선거에 대해 불반대 불참가(不反對·不參加)를 선언
1950. 5.30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1950. 6.25  한국전쟁 발발
1950. 12.10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에서 서거

자료정리. 민족회의 상임공동대표 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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