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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 김규식박사의 민족자주 통일노선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7.14 조회: 2219

김규식의 민족자주 통일노선

우사 김규식은 해방 이후 초지일관 극좌나 극우에 의한 국가건설은 반드시 민족의 불행을 이끌 것이라는 점에 확산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해방정국에서 온건 세력들의 결합으로 통일민족국가 수립이야 말로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가 나섰던 좌우합작위원회의 결과물인 좌우합작 7원칙 같은 경우 당시로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민족국가 건설 방략이었다. 46년 10월 7일 합의된 좌우합작 7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좌우 합작 7대 원칙 발표

조선의 좌우 합작은 민족 독립의 단계이요, 남북 통일의 관건인 점에 있어서 3천만 민족의 지상 명령이며 국제 민주화의 필연적 요청이었음에 불구하고 저간의 복잡 다단한 내외 정세로 오랫동안 파란 곡절을 거듭해오던 바 10월 4일 좌우 대표가 회담한 결과 과반 발표된 좌측의 5원칙과 우측의 8원칙을 절충하여 7원칙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합작 원칙과 입법 기구에 대한 요망을 작성하여 발표한다.

본 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下와 如히 의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 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  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며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의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우여곡절 끝에 창출된 좌우합작 7원칙은 해방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처음이자 마지막 합의문이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의 주장을 각기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도 해방정국의 주요현안들을 타협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접근들을 통하여 이념적 간극을 최소화시키며 민족의 당면과제인 통일독립정부수립을 자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들이 제시된 것이었다.

우선 합작7원칙은 좌우가 합의할 수 있는 임시정부문제와 미소공위의 속개만을 강조했다. 분열의 뇌관인 신탁통치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 수립 뒤의 과제였다고 본 것이다.

둘째, 좌우의 극심한 대립요인이었던 친일파제거의 문제는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위원회의 조례 제정으로 처리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셋째, 국민적 입장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던 토지개혁에 있어서 좌우파의 주장을 취합한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에 의한 무상분여를 제시함으로써 좌우가 머리를 맞대면 이렇게 합리적인 방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실재화시켰다.

끝으로 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일체를 결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미군정의 단정수립운동이라는 공산당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된 뒤 우사는 본격적인 남북통합의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추진을 본격화 했다. 48년 1월 27일 UN 한국위원단 전체회의가 끝난 뒤 김규식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1) 총선거에 대하여-이 문제는 至公 無私하게 국민 전체에서 유익하고 완전한 민주주의적으로 하려면 많은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준비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2) 북한 방문 불능시에는-모스크바에서 기별이 있었던 것과 같이 입북이 불가능하다면 남한 某方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남한에 단정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그 여부에 대하여 내 개인 생각으로서는 UN 한국위원단으로서는 하지 못할 것이며, 주장도 못 할 것으로 생각한다.

UN 한위의 사명은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감시하는 데 있는 것이요, 단독 정부를 수립하라는 사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만사가 不如意하여 그 문제가 나오게 된다면 UN 소총회에서 이것을 결정할 것이요, 소총회에서 불능이라면 UN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남북이 분할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단정’이란 말을 모른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중앙 정부는 있으나 단정이 정부 행세하는 일은 없다.

38선은 미-소 양국에서 만든 것이지 한인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38선 경계선은 結者解之로 만든 자가 제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UN 총회에서 한국 독립 문제나 자유 획득 문제를 책임지고 있으므로 이 38선 제거도 UN총회에서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3) 단정 문제에 대하여-UN 위원단이 여하간 이것을 주장한다면 그 결과는 한국의 북반을 영원히 타국의 위성국화 내지 연방화가 될 것이니 제공들이 이런 결과를 재래 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사람이 이런 것을 주장한다면 역사적으로 주장한 조선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북한까지 합칠 고려가 있어 3분의 2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 중앙 정부로서 UN에서 승인하고 통합 방도가 있게 된다면 재론할 문제다.

(4) 남북 요인 회담 알선에 대하여-북행이나 남한 선거 감시 여부를 불문하고 소련의 주장이 한인 문제는 남북 한인이 모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자 하였으니 이에 근거하여 남북 요인 회담을 알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담은 남한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우사는 유엔한국 임시위원회가 입북하지 못할 경우 한국문제는 유엔소총회나 유엔 임시총회에서 재검토해야 할 일이라며 단정 수립이 유엔한국 조사위원회의 사명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김규식은 북한까지 통합할 방도가 있으면 유엔이 승인하는 남한 중앙정부 수립 문제는 다시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라 언급함으로써 단선 참여의 여지는 남겨놓고 있었다. 김규식은 그 밖에도 남북요인회담에 대해서는 남한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점과, 동시 철병론에 대해서는 3-6개월의 철병준비 기간이 있어야 됨을 주장했다.

요컨대, 김규식은 철병론과 남북요인회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한국 문제에 대해 유엔이 단선 결정이 아닌 다른 결정을 취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김규식의 생각과는 좀 다르게 민족자주연맹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홍명희 주도의 민주독립당은 처음부터 남한 단선에 대한 분명한 반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민족자주연맹 내의 5당캄파세력의 중간좌파세력 역시 남북협상에서만 중도진영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 뿐, 양군 철병론이나 유엔감시 반대에 있어서는 좌파진영과 거의 동일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1948년 2월 4일 민족자주연맹은 위원장 김규식 주재 하에 정치위원(홍명희, 원세훈, 윤기섭, 손두환, 김성규), 상무집행위원(안재홍, 김붕준, 최동오, 여운홍, 유석현, 조헌식, 권영우, 이상백, 이경석, 박건웅, 신기언, 정윤형, 김성숙, 신숙, 배성용, 강현철, 송남헌)이 참석하는 연석회의를 삼청장(김규식 숙소)에서 개최, 남북통일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발송하기로 했다.

이 결의에 따라 우사는 그 당시 장덕수 살해사건의 관련설로 난처한 입장에 빠져있던 김구를 방문하고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신기언이 기초하고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한은 엄항섭이 기초하여 김구, 김규식 두 사람의 연서의 사신 형식으로 발송할 것을 합의했다.

이처럼 남북협상을 먼저 제의한 것은 김규식 이였고 그는 김구와 합의해 북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통일문제 토의를 위한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북측의 답신은 3월 27일 김일성과 김두봉의 연서로 된 편지였다.

1. 해방된 지 2년 반이나 지나도록 우리가 남북으로 분열되어 완전한 통일 독립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2. 북조선은 자기 손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나 남조선은 주권이 미국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정신상, 물질상 곤란을 받고 있다.

3. 이에 대한 책임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을 적극 반대한 이들에게 있다.

4. 금차의 UN결의, 더구나 UN 소총회의 행동은 찬성할 수 없다.

5. 소련이 총회에 제의한 바와 같이 양주둔군 철퇴, 조선 대표 참가 그리고 조선 문제 해결은 순전히 남북 조선인에게 맡겨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처리하자.

6. 미국의 주장으로써 소련의 제의가 부결되고 UN 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7.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하려는 본지에서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 연석회의를 1948년 4월초에 평양에서 소집할 것에 동의한다.

8. 이 회의에 참가할 사람은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노,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외 5명으로 하자.

9. 토의할 내용은,

A. 조선의 정치 현상에 관한 의견 교환

B.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반동 선거실시에 관한 UN총회의 결정을 반대하며 투쟁 할 대책 수립

C. 조선 통일과 민주주의 조선 정부 수립에 관한 대책 연구 등등,

D. 만일 우리 양인이 동의할 때에는 1948년 3월 말일로 통지하기를 희망한다.

서한 형식의 무례한 표현은 물론 양김이 제의한 남북요인회담에 대한 문제는 무시된 채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의 일방적 결정에 의한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을 요망한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김구, 김규식은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북측의 회신이 있자 남북협상은 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미군정도, 이승만도, 한민당도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백범은 “미리 다 준비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기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회담 요구를 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협상의 성공 가능성여부보다는 국토 분단과 민족분열이 시시각각 고착화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민족주의자로서의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김규식은 북행과 단련해 다음의 6개항의 단서를 달았다.

첫째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줄이기 위해 스탈린의 초상을 공공기관에서 제거할 것,

둘째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세째 북한지역에서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200명의 대표를 선출하는 남한의 대표들과 회합할 것,

네째 북한에서의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북한은 최소한 1인의 유엔한위대표단을 초청할 것, 다섯째 평양 또는 서울 회담은 독립 실현의 방법만을 논의할 것,

여섯째 점령군의 공동철병에 대한 선전을 중지하고 군대 철병 조건에 대해 미소간 회합을 시작하도록 소련에 요청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김규식이 내세운 이상과 같은 조건으로 미루어볼 때, 남북협상과 관련하여 김규식이 구상했던 바는 남북한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독자적인 총선을 실시, 그 대표들로 하여금 국회를 구성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케 하는 그러한 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같은 구상에 대해 북한측이 이의 시행을 보장해줄 경우 그는 유엔한위에 남한 총선 연기를 요청할 셈이었던 듯하다.

김규식이 이러한 구상을 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우선 여운홍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에 파견된 두 연락원은 남한 총선 시행과 동시에 북한에서도 북한지역에 할당된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는 문제에 대해 북한측과 협의토록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여운홍은 북한측이 이 제안을 수락했을 경우 자신들이 유엔한위에 북한지역의 선거 감독을 요청하는 한편 이를 위해 남한 총선 연기를 요청할 방침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김규식이 남한 단선 연기를 요청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 소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던 것이라 여겨진다.

곡절 끝에 북행을 단행한 양 김은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4월 19일 -4월 26일)와 ‘남북요인회담’으로 불리는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4월 27일-4월 30일)에 참석했다.

특히 남북요인회담에서는 공동성명을 통하여 외국군의 즉시철군, 철군 후 내전발생 부인, 임시정부 수립과 그 정부하의 총선거실시로 통일민주정부수립, 남조선의 단선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4월 26일 김두봉 초청 만찬 중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인이 회동해 4김회담을 통하여 북한의 송전계속, 연백수리 조합 개방, 조만식의 월남허용 등이 제기되었고 이중 앞의 두 가지는 북측으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김구, 김규식 양 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북측 지도자들과 합의했을 뿐 아니라 민생문제와 직결되는 송전, 수리조합 문제까지를 동의 받아내고 5월 5일 귀경했다.

다음날 김구 김규식 은

첫째,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회의였다는 점

둘째, 이 회의의 목적이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남북의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데 있었으며, 미․소 양군 철퇴를 요구하는 데도 의견이 일치했고, 북쪽이 절대로 단정수립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한 점

셋째, 연석회의에서 합의하지 못한 국제협조와 기타 몇 개 문제는 앞으로 남북지도자가 자주 접촉하여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점

넷째, 송전과 연백저수지 개방을 동의했으며 조만식의 문제도 월남시키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점 등을 들어 협상을 평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금반 우리의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이요,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반 행동으로써 많은 기대를 이루어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행동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양조선의 단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일치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로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연석회의에서 국제 협조와 기타 수개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종래 주장이 다 관철되지 못한 것은 우리로서는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국제 협조 문제에 대하여서는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의 독립을 더 잘 도와주느냐는 실지 행동에서 용이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며 또 기타 문제에 있어서도 앞으로 각자가 노력하며 남북 지도자들이 자주 접촉하는 데서 원활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행동으로써만 우리 민족이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뿐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앞으로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발할 것을 쾌락 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 당국자는 금차에 실행할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공동성명은 그 내용으로만 본다면, 우선 보다 분명한 통일방안과 절차를 제시하고 있었다.

즉 남북한에서 양군이 철수한 후,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의 통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정식 입법기관을 구성하고 여기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그 헌법에 따라 정부를 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이 성명은 외군이 철수한다 할지라도 내전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 내용만으로는 남북한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안이라 할 수 있었다.

남북협상에서 합의된 내용 중 제일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미-소 양군의 철수문제였다. 공동성명에서 나온 것과 같이 외군철수 후 남북을 통한 임시정부 구성과 총선거 실시,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순으로 합의되었기 때문에 외국군의 철수가 선결문제였다.

러나 외국군 철수 후 북한측에 의한 무력도발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외국군 철수반대의 이유였으므로 김구는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전에는 미-소 양군 철수 후의 치안담당을 UN군이 담당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남북협상에서는 북측으로부터 내전을 도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다.

남북협상에서의 미-소 양군 철수요구안은 북한에선 김두봉에 의해 소련점령군사령관 ‘코로트코프’에게, 남한에선 협상에 참가했던 여운홍 등에 의해 조선주둔 미군사령관 ‘하지’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는 이에 대해 “UN의 결의안에는 전조선에 걸쳐 총선거를 실시한 후 조선국민정부가 수립되면 가급적 속히 양군이 철퇴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하여 정부수립 후의 철군안을 고수했고, 코로트코프는 “소련정부는 조선으로부터 미국군대가 동시에 철퇴한다면 조선에서 소련군대는 즉시 철회할 준비가 완료되었다”하고 회신했다.

남북협상에서 합의한 외국군의 철수문제가 미국측의 정부수립후 철군안과 소련측의 양국군 동시 철수안으로 대립되고 있을 때 5월 10일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는 실시되어 버렸다.

그러자 북측에서도 준비된 대로 단정수립을 위한 단계를 밟아 8월 25일 총선거를 통한 9월 9일 북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해 버렸다.

결국 남북협상은 비현실적인 무모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냐 사도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의 현실적인 자치론 주장과 비현실적인(?) 무장투쟁론 주장과 같은 맥락의 차이였다.

그럼에도 남한측에서는 우파 및 중도진영 26개 단체 대표 166명과 좌파진영 15개 단체 대표 230명 등 총 41개 단체 대표 396명이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좌파진영은 물론 민족자주연맹을 비롯한 중도진영의 대부분과 우파진영의 주요한 정파인 한독당을 포괄한 것으로서, 이승만세력과 한민당 세력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남한 정치세력들이 단선을 거부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남북협상 성공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란 현실적 차원이 아니라 남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결집 그 자체의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은 남북협상진영의 대단한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남북협상진영으로 이렇게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무조건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남북협상에 대한 김구의 열망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진영의 단합이란 배경이 있었다.

그만큼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립을 향한 전 민족적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Ⅴ. 민족자주 통일독립정부의 꿈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성명을 발표한 후 일체 침묵을 지키며 정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5.10 선거를 며칠 앞두고 미군정 당국은 그래도 김규식에 대하여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5.10 선거 이후에 이루어질 정국의 전면에 김규식을 내세월볼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정의 집요한 강권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에 대한 `불반대 불참가` 원칙을 고집하고 당분간 정계에서 은퇴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전부터 미군정은 1946년 1차 미-소공위 이후부터 미국무성의 극좌 극우 배제정책에 따라 김규식을 정계의 전면에 등장시키겠다는 미련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학자형 정치가 김규식은 온건한 성격이기도했지만 무엇보다도 남한 단독 선거로써 이루어지는 정권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강한 민족 자주 의식은 물론이고 그동안의 그의 행동과 배치됨으로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부득이 김규식에 대한 모든 미련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5.10 선거는 48개 정당과 사회 단체의 948명의 입후보자가 선거에 참여하여 등록 유권자의 95%(미등록 유권자까지 포함하면 75%)가 투표함 으로써 무소속이 전의석의 44%인 85석, 독촉이 55석(235명 입후보), 한민당이 29석(91명 입후보)을 차지했다.

6월 들어 남한의 정세변화에 김일성과 김두봉은 백범과 우사에게 “해주에서 긴급 회동을 위한 월북을 요청”하는 제 2의 남북협상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김규식과 백범은 “현재의 여건이 4월달의 입북 때와는 달리 변화도 많고 입북이 불가능하므로 서신만으로는 이해가 잘 안되니 체북 중인 홍명희 동지를 남하케 하여 그 편에 요건을 상의하기를 요망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홍명희는 내려오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은 북한도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여 정권을 수립할 예정이므로 양위는 여기에 호응해 달라는 요청서를 다시 보냈다.

이에 두 사람이 응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제 2차 남북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의 담화는 이들의 민족자주독립정부 수립의 의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통일이 없으면 독립이 없고 독립이 없으면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천경지위이다. 우리가 지난 12월에 UN의 한국 문제에 대한 결의를 지지한 것도 우리 조국의 통일 독립을 전제로 한 까닭이요, 그 내용이 우리에게 만족하여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에 입경을 거절한 이유로 금년 2월 26일에 UN 총회가 결정한 개정안은 우리 조국의 분열을 내포한 결의로서 강한 소련의 농단을 더욱 고동하는 반면에 약한 우리를 유린하였다.

이때에 있어서 진정한 애국자의 갈 길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전민족 단결로써 정의를 위하여 투쟁할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남북협상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로 미-소 양군 철퇴후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던 정당, 사회 단체의 주축으로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자주 민주의 통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굳게 약속한 것이다. 이로써 조국의 서광이 비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남측을 핑계로 또 다른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히 반대하고 그것은 장차 동족상잔의 비극을 배태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예언은 적중했고 남북은 이후 오랜 기간을 적대적 관계 속에서 대치하는 민족적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해주, 평양에서 소위 2차 남북협상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괴의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회의가 일방의 독단일 뿐 아니라 그 참가 단체로 보더라도 제1차 협상에 남한을 대표하여 참가한 정당, 사회 단체 21개에 비하여 과연 寥寥無聞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민의에 의한 통일이라고 주장하며 인민회의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이로부터 남북은 호상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동족 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우사와 백범은 여전히 첫 번째 남북협상에서 합의한 사항들의 이행만이 민족 모두의 숙원인 자주적 통일민족정부를 수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천명하면서 전민족적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거듭되는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사의 초지일관하는 민족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꿈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 되는 상황에서도 우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5.10 선거의 실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확정하는 것이었고 북한 역시 단독정부 수립의 선언만을 남겨 둔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우사와 백범은 자신들과 함께 남북협상을 이끌었던 애국지사들을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성회의”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우사와 백범이 남하 한 이후인 48년 6월 7일 발기했고 7월 21일 정식회의를 개최했었다. 통일독립촉성회의는 그 발기 취지서에서 이 회의의 목적을 “분할의 정세를 극복하고 통일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민족의 총단결을 요청하고 또 총력량 집중을 기도하며 또 그를 위하여 분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한 우사와 백범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자신들의 민족자주통일독립국가에의 꿈을 확실하게 피력하고 있다.

통일이 없이는 독립이 있을 수 없고 독립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쟁최하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민족 단결뿐이다.

그러나 현시에 우리 조국이 미-소 양국의 분단 점령을 당하고 있는 이상 국제 협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 협조에 노력하였고 앞으로 이 노력을 계속할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하여 국제 협조의 노력도 공고한 민족 단결이 있은 뒤에야 주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다.

우리들의 남북협상도 이러한 견지에서 추진하였던 것이다. 국제 제약하의 난사업인 남북 협상 공작이 단번에 만족한 효과를 거두리라고 당초부터 믿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나 외력 없이 우리의 손으로 평화스러운 자주 민족 통일적 조국 건설 공작이 제일보를 내디디었던 것은 우리 전도에 새로운 희망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 김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세는 더욱 부정적으로 흐르고 있음이 현 정세라는 것을 적시하며 그들은 더욱 일치단결된 민족의 힘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나아가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적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4가지 통일독립노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통일 공작은 전체 애국 동포의 노력에서만 성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3천만이 총궐기하여 일치한 의사로써 내로 통일 방해 공작을 방지하고 외로 정당한 여론을 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우리는 아래와 같은 방침으로써 애국 동포와 함께 통일 독립 노선으로 매진하려 한다.

1. 통일 독립 운동을 목적한 기구를 강화, 확대할 것.

2. 상술한 기구를 통하여 통일 독립 운동의 이념과 방략을 일반 국민에게 철저히 침투시킬 것.

3. 조국의 재건과 민족의 복리는 평화로운 건설에서만 성공될 것이니 야만적 파괴와 테러와 잔인한 동족 살해를 배격할 것.

4. 우리의 통일 운동을 강화, 확대함으로써 우리의 일치한 의사를 국제 여론에 반영시킬 것.

통일독립촉성회의를 통해 우사는 국제정세와 남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주기적인 회의와 소극적인 담화문 발표 등으로 나름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초에 들어와 김규식의 주변은 다소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제2대 국회위원 선거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48년 5․10 제헌의원선거 당시 불참 입장을 밝혔던 김규식은 직접 나설 의사는 없었다. 그렇지만 전국 각지로 사람을 보내 당선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 연맹계열 인사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정선거와 특히 남북협상 지지파에 대한 상대후보의 인식공격에도 불구하고 5․30 선거 당선자 가운데 김구․김규식 노선

을 지지했던 인물들이 상당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 결실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Ⅳ. 결론

근대 이래로 주된 정치체는 민족국가(nation-state)이다. 인류는 어느 시대에나 정치적 충성의 대상-정치공동체-을 가지게 마련이며 근대 이후에는 정치적 충성이 민족국가에로 향하여 왔다.

민족국가의 큰 장점은 문화적 응집력과 정치적 통일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공동의 문화적 또는 종족적 동질성을 나누는 인민이 자치정부의 권리를 가질 때 공동체와 시민은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랜 기간 단일국가를 유지해 온 우리에게 분단체제의 지속은 신 국제질서 하에서의 정치적 단위로서의 기능상실뿐만 아니라 민족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21세기 분단의 극복이야말로 전 민족의 역량과 슬기가 집결되어야 할 과제일 수뿐이 없다.

여기서 한민족 국가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는 민족정신과 이념에 입각한 주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즉, 민족은 각 시대와 그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의 구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21세기의 신 국제질서는 분명 세계화의 시대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바탕은 민족국가일 수뿐이 없다는 점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민족국가의 생존이 없는 세계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민족이념에 의한 통일조국의 실현을 위한 우사의 사상을 논해야 할 이유 역시 명백한 현실인식에 바탕 한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 민족주의의 결합의 가능성이 다분히 당위론과 총론적 차원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통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해나가야 하는 이 시점에서 통일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화 작업은 남북한 통일방안의 수렴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사의 자주적 민족통일론은 우리 주변에 회자되는 많은 통일론 중에서도 가장 민족주의적 사고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분단을 야기한 많은 요인 중에서도 남북의 갈등을 민족의식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통일론이다. 또 그것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주의, 주장보다도 민족을 우선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는 통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의 변수보다도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과 실천을 중요시 여기는 통일론이다. 나아가 그것은 통일과정을 강조할 뿐 아니라 통일이후 우리가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략까지를 제시하는 통일론이다.

우사의 통일론은 반세기 이전에 나온 통일론임에도 여전히 그 유효성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실천의지와 자세이다. 그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통일에의 길이다.◎

자료정리. 민족회의 상임공동대표 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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