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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증거·문서 찾아와라” 퇴짜놔
글쓴이: 관리자(family)
등록일: 2008.01.07 조회: 2447
공적 증거·문서 찾아와라” 퇴짜놔

의병운동 시기까지 포함하면 항일 독립운동사는 50년을 훨씬 넘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사망자를 포함해 9,300여명 밖에 안된다. 이는 전체 보훈대상자 61만여명의 2%도 안되는 수치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 또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정부가 독립운동과 운동가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후손과 뜻있는 역사학자들이 스스로 완벽한 ‘증거’와 ‘문서’를 찾아오면 그때서야 심사를 벌이는 탁상 행정 위주의 소극적 보훈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더라도 단순한 시혜적 차원의 물질적 보상만 따를 뿐 독립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예우는 별다른 것이 없다. 때문에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은 스스로를 ‘3·1절과 8·15 등 국가 행사의 들러리’라는 자조적인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립운동 행적, 입증은 유족 책임=평안북도 자성 출신의 고 방제명씨(2002년 작고)는 1942년 고향의 일본 신사를 파괴하고 달아나다 붙잡혀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부인 박춘홍씨(70)는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서를 들고 국가보훈처에 찾아갔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박씨는 남편의 한(恨)을 풀기 위해서라도 ‘증거’를 찾으러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남한으로 내려온 고향사람 32명을 수소문해 당시 남편의 행적에 관한 증언과 서명을 받아 보훈처에 제출했지만 ‘문서로 입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씨는 “보훈처가 문서 증거만 요구할 뿐 기록을 함께 확인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 외무성이나 관방부로 가 당시 남편의 법원 재판 기록을 찾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임영숙씨(45·여)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할아버지 임우규씨(작고)에 대한 서훈 신청서를 지난해 5월 신청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임씨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문서도 같이 제출했지만 옥고를 치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며 “정부가 독립운동가 발굴과 심사과정에서 너무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수년째 독립운동가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하동항일독립투쟁사연구소 정재상 소장은 “정부의 노력과 의지, 관심이 부족하기 그지없다”면서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문서’를 보내도 현지 조사는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서류만 심사하고 인력부족과 예산 탓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향토 자료의 독립운동 기록은 ‘객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경시하고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기록만 인정한다”면서 “정부기록보존소마저 문턱이 높고 절차가 까다로워 향토사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 기록을 찾는 것마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보훈처는 “객관적이지 않은 자료로 심사 기준을 삼았다가 나중에 허위로 드러나면 심사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면서 “증거와 문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두고 심사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예우는 없고 보상도 미약=독립유공자로 인정받더라도 정부의 홀대는 계속된다. 예우가 없는 시혜차원의 보상은 독립유공자와 후손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 오우종씨(62)는 “정부는 우리를 국가행사 때 불러내는 들러리 정도로만 여긴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오씨는 “8·15 행사 같은 때 초청받아 가면 독립운동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주빈이고 후손들은 뒷자리에 앉아 푸대접만 받고 온다”고 말했다.

보상에 있어 광복 이전 사망한 독립유공자는 3대까지, 광복 이후 사망한 유공자는 2대까지 주어지는 연금 혜택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이강년 의병장의 증손자인 순국선열유족회 이인규 회장은 “나는 증손이라 연금혜택에서 제외돼 있고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많다”며 “면암 최익현 선생의 고손자 최창규 전 성균관장도 선친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독립유공자유족회 이건흥 이사는 “독립운동을 한 사실보다는 사망 시점을 더 중요시하는 정부 정책은 넌센스며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1945년 이전에 독립유공자가 사망했으면 아들·딸 및 손자·손녀까지 연금 혜택을 주고 있으나, 광복 이후 사망한 유공자의 경우 아들·딸까지만 보훈혜택을 주고 있다. 보훈처는 “기준시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며 그분들의 업적을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의견=전문가들은 ▲예우 중심의 정책 ▲정부의 적극적 발굴 자세 및 증거주의 보완 ▲독립유공자 전담기구 신설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수원대 박환 교수는 “정부는 독립유공자를 행정 대상자로만 여기는 것 같다”며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특히 젊은이들의 이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윤해동 연구위원은 “현재 심사 기준인 문서 증거주의를 보완해야 한다”며 “정부가 직접 나서서 생존자들의 증언 수집과 국내·외의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적극적인 역사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원은 “독립유공자 전담 기구를 만들어 물질적 보상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정신적 예우와 학술·교육 등 연구분야에도 애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훈제도 “예우는 뒷전 정권 입맛따라”

54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보훈정책에서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은 늘 소외돼 있었다.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보다는 그때그때 국가나 정권의 필요차원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책이 시행돼 왔다.

대한민국 보훈제도 효시는 1950년 공포·시행된 ‘군사원호법.’ 친일파가 득세한 이 시기의 법안은 군복무 중 순직한 이들의 유족에 대한 원호업무에 관한 것으로 항일독립유공자는 대상에서 포함되지 않았다. ‘도와주며 보살핀다’는 ‘원호’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보훈제도는 그 출발부터 ‘예우’보다는 ‘시혜적 보상’ 중심이었다.

1961년 최초의 보훈 전담부서인 ‘군사원호청’이 창설됐으나 당시에도 독립유공자는 대상자가 아니었다. 1962년에 군사원호청이 ‘원호처’로 승격된 뒤에야 독립유공자가 ‘원호’ 대상이 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시 정권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고 반공주의 때문에 보훈제도를 군·경 위주로 끌고나갔다”며 “민족정신 회복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를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1985년 ‘국가유공자예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원호처가 현재의 국가보훈처로 확대·개편됐다. 이 시기에 독립운동가가 첫번째 보훈대상으로 규정됐지만 여전히 다른 국가유공자와 동일하게 취급됐다는 지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당시 5공 군사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활용했다”며 “5공은 민족정기 선양사업을 벌여 정통성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목숨걸고 싸웠던 독립운동이 단지 정권의 책략에만 이용된 셈”이라고 말했다.

국민의정부 출범 뒤 광주민주화운동자가 유공자로 승격되는 등 보훈대상 범위가 확대됐지만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기준은 확대되지 않았다. 1994년 문민 정부 때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2002년까지 6차례에 걸쳐 개정됐지만 실질적 ‘예우’를 담지는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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