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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쯔라-태프트 밀약
글쓴이: 조진숙(kjs3001kr)
등록일: 2010.07.22 조회: 2096

가쯔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장관 (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 과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가쯔라 다로오(桂 太郞) 사이의 Taft-Katsura 밀약(密約)<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라고도 함>>은 대한제국이 앞으로는 더 이상 러시아와 친선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봉쇄하기로 한 밀약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1.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 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 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 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 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 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 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 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 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 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한.미 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 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2.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 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 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자료정리.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강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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