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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의 보천보 전투 인쇄판, 항일의미 담았었나?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7.12.18 조회: 2245

동아의 보천보 전투 인쇄판, 항일의미 담았었나? 


지난달 27~28일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관계자의 일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고승우 논설실장이 묘향산 입구 국제친선전람관에서 발견한 ‘동아일보 보천보 전투 순금 인쇄판’(사진)을 보고 느낀 단상을 싣는다./편집자

 

 

동아일보는 조선, 중앙일보와 함께 북한에 대한 부적절한 보도로 손꼽히는 국내 일간지의 하나다. 이 신문은 6·15선언 이후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냉전적 시각으로 일관, ‘대북 퍼주기’와 ‘친북좌파 정권’ 등의 공세를 줄기차게 펴왔다. 그러나 동아는 9년 전 북측에 김일성 주석의 항일 운동을 기리는 순금 신문 인쇄판을 선물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바 있어 오늘날의 보도 태도와 크게 대비된다.

필자가 최근 방문한 평안북도 묘향산 입구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의 ‘김정일 장군의 선물관’에는 동아 취재단이 지난 1998년 10월 26일 선물한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금 인쇄원판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람관에 전시된 남측 언론사 선물은 한겨레신문 창간호 동판(최학래 전 한겨레 신문사장 기증),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시계 등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 일단의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원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를 습격한 독립운동 투쟁이다. 보천보란 마을은 압록강 상류 혜산진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가 기사로 보도했고 당시 보도된 신문을 금으로 인쇄해서 지난 1998년 10월 26일 북측에 선물한 것이다.

국제친선전람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동아의 금 인쇄원판은 지금까지 그 원형 모습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측이 최근 전람관의 주요 품목을 책자로 만들어 판매하면서 그 모습이 실렸다. 그 밖의 남측 언론사 기증품은 소개되지 않았다.

전람관을 안내하는 탁경화(41)강사는 동아 보천보 기증품이 금 1.2kg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해 동판에 금박을 했다는 종래의 일부 견해를 부인했다. 보천보 기증품은 함봉심 선수가 아시안 게임에서 테이프를 끊고 골인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밑에 놓여 있다. 금 인쇄원판 밑에는 문규현 신부의 부채, 진각종 대표단의 칠공예품이 놓여있다. 금 인쇄원판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15cm 정도로 보였다.

금 인쇄원판에는 원래 호외 신문 기사의 작은 제목, 본문의 일부 글씨가 흐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항일독립군을 일제가 ‘비적’ 등의 칭호로 표기하도록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본 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표기였기 때문이다. 동아는 북측에 기증한 금 인쇄원판을 제작할 때 항일독립군의 호칭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보천보 전투를 소개할 당시의 동아가 어떤 처지였느냐를 보면 이 보도의 의미가 불투명해진다. 동아는 한 해전인 1936년 이른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기자 5명이 쫓겨나고 다음 해 6월 1일까지 무기발행정지를 당했었다. 보천보 전투는 이 신문의 무기 발행정지가 해제된 직후 발생한 것이다.

이 기사의 제목과 기사 내용은 항일 독립군이 무장 투쟁을 했다는 것이 아닌 일본 쪽이 피습을 받아 어떤 피해를 당했다는 내용이다. 동아는 오늘날 항일운동을 보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동아가 총독부의 허락을 받고 ‘비적’의 ‘가해 행위’를 보도해 한민족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 또한 가능하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부터 일제의 언론 통제는 전시통제로 강화되어 모든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간 신문들도 일제의 통치정책을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못했다.

일제는 당시 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중국의 동북지방을 군사력으로 제압해 ‘만주국’으로 만들고 이어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키고 12월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다. 이후 동아는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의 경쟁을 격심하게 벌이다가 1940년 폐간되기까지 5년 동안 한국 언론사에 지워버릴 수 없는 모멸의 발자취를 남겼다. 즉 징용과 징병, 신사참배를 일제 대신 한민족에게 강권하는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 실천에 앞장섰다.

이상과 같이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동아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키 위해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보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사기 충분하다. 이에 대해서 학계의 면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동아, 조선은 창간 당시부터 합법지로 살아남기 위해 체제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민족 최대의 염원인 독립 쟁취는 이들 신문의 보도, 논평 영역에서 제외된 채 총독부라는 외세의 한반도 지배를 전제로 한 언론활동만이 허용되었다.

총독부는 신문지법과 출판법외에 총독부령을 발동해 신문을 일일이 검토하여 기사 삭제, 발매 금지,압수 등을 되풀이 했다. 이들 신문은 창간 후 폐간될 까지 일제로부터 압수 등 행정처분을 많이 받았지만 한민족 독립 쟁취에 대한 기사나 논평으로 인해 제재를 받은 사례는 없다.

대신 일제의 구체적 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비판하는 체제 언론적 차선책을 부각시켰다. 이 신문들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보다 문화적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동아일보, 고승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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