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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75주기 추모식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07.12.18 조회: 1469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75주기 추모식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전승축하 기념식장을 폭파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매헌 윤봉길의사 순국 75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1시 효창공원 윤 의사 묘전에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이명박)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김정복 국가보훈처장, 김국주 광복회장을 비롯해 독립운동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명박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의 식사와 국가보훈처장‧광복회장의 추모사, 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윤봉길 의사(1908. 6.21~1932.12.19)는 충남 예산에서 출생해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927년 구매조합을 조직해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고 독서회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윤 의사는 1928년 부흥야학원을 설립해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1929년에는 월진회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자 1930년 3월6일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1년 5월8일 상해에 도착한 윤 의사는 한인 동포 실업인인 '박진'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에 취직‧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윤 의사는 1932년 봄 상해 홍커우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인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며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했다.
1932년 4월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을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을 접한 윤 의사는 살신구국의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1932년 4월26일 김구 단장 앞에서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 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40분께 윤 의사는 김구단장으로부터 받은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투척해 일본의 수뇌부를 폭사시킴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한국과 중국의 항일연대에 크게 기여했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피체된 윤 의사는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며 그해 5월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11월18일 오오사카 육군 위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19일 오전 7시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25세의 나이로 이국땅에서 순국한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선생의 요청에 의해 일본에 있던 박열, 이강훈 선생 등의 주선으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1946년 6월30일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 뉴시스 허브, 송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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