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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洲에 對한 小考
글쓴이: 윤재희
등록일: 2012.04.10 조회: 1675

滿洲에 對한 小考

                            윤재희(독립유공자유족회 상임부회장)

 

만주라는 말은 중국에서 이른바 동북삼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 성)을 가리킬 때 쓰이지만 원래는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족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가 자신을 칸으로 칭함과 동시에 나라의 이름을 만주로 바꾸면서 민족명도 만주로 바꾸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만주가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처럼 민족의 이름이 청 제국의 역사 속에서 차츰 요서, 요동지방을 가리키는 지역 명으로 바뀌고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의 동북지역을 일컫게 되었다.

간도(間島)는 원래 간도(墾島), 간토(墾土), 한토(閑土), 곤토(坤土)에서 간도로 변명 되었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쪽을 서간도 두만강 쪽을 동간도 또는 북간도로 부르는데 청은 명을 정복하기에 앞서 조선의 배후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을 복속 시킨 후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지역 일대에 버드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류조변(柳條邊)이라 한다. 일종의 비무장지대였던 셈이다.

또한 입관후(북방민족이 강해져서 산해관을 넘어 중원지역으로 진출하는 것)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흥지이자 청 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의 용흥발상지지(龍興發祥之地)라 하여 아무도 들어가 살수 없도록 하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펼쳤다.

이후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지역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무주지로 방치되었다가 19세기 이래 거듭되는 흉년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 주민들이 월강하여 경작을 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이전에는 선(線) 아닌 지대개념(地帶槪念)이었던 국경문제가 본격화 된 것은 1881년 조선인의 월강을 문제 삼은 청이 두만강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부터이다. 이 과정에서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사이에 갈등이 불거진다.

중국 측은 토문(土門)은 투먼 즉 두만강 이라고 하면서 우리와 국경협상이 깨지고 임오군란 후 유리한 관계 속에서 중국은 간도지역을 길림성 관할에 두는 한편 조선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귀화를 종용하며 치발역복(만주족처럼 머리를 땋고 그들의 고유의상인 호복을 입는 것으로 면발역복이라고도 함)을 강요했다. 결국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처지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간도협약(1909년)에 의해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청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지어진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전후 조선농민의 만주 이주는 1894년 6만 5천 명, 1905년 7만 8천 명, 1910년 20만 명, 1930년 60만 명, 1945년 160만~170만 명이었고 1945년 조국 광복과 함께 80여 만 명이 귀국했다.

서양학회 일각에서는 한족중심의 중화적 역사관을 한화이론(漢化理論)이라고 비판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등과 한족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국면을 이루고 있다며 북방 유목민들의 관내진출이 동아시아 역사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도 한다.

* 참고로 여기에서 관내라는 어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에서 서쪽의 한족 통치지역을 칭하며 반대되는 만리장성의 바깥쪽 즉 북방민족과 접하고 있는 동쪽을 관외 또는 관동이라 칭한다.

토문(土門):산이 높고 골짜기가 높은 모양이 마치 흙으로 된 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토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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