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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광복절을 간수하자’는 매국적·반민족적 역사의식에 개탄한다.
글쓴이: 조용희
등록일: 2012.02.10 조회: 5723

보훈복지TV [오피니언 사설]
‘이제는 광복절을 간수하자’는 매국적·반민족적 역사의식에 개탄한다.

 

조용희(대한민국 광복회/독립유공자유족회, 예비역 육군 준장)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인터넷신문(KONAS net 2012년 1월17일자 칼럼)에 게재된 '이젠 대한민국 건국절이다!' 부제 “이제는 광복절을 간수하고 대한민국 건국절을 내세우자”라는 글을 읽고 까무러칠 뻔했다. 한 나라의 건국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아직도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건국절 제정에 관한 문제는 국가적 중대사로서 필자의 소견은 논외로 하나, 다만 동조하는 자들만의 성찬으로는 국민적 합일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 칼럼의 대목 중 “우리는 흔히 8.15광복절을 마치 몇 백년 된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로, 또한 우리나라 개천 이래 일제의 속박이었다가 그제야 독립된 날로 인식하고 아주 감격적으로 기념해오고 있다.", “우리가 잠시 방심한 틈으로 침략한 일제에 의하여 불과 36년간(1910~45)을 지배당했을 뿐이다.” 라는 망발이 있다. 이에 일제의 강제병탄과 식민통치를 5천년역사의 1%에도 못 미치는 일과성 사건으로 경시,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숭엄한 가치를 폄훼하는 매국적·반민족적 역사의식에 개탄한다. 또한 굳이 헌법적 의미가 담긴 광복절을 짓뭉개어 건국절로 대체하려는 데는 국가 탄생의 경축을 앞세워 그 어떤 보상을 도모하려는 또 다른 저의가 숨겨져 있지는 않는지 우려스럽다. 일제 통치하의 친일 권력은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지배권력으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그들은 독립운동 세력의 부상을 차단하기 위해, 일제 무단통치의 야수적 만행과 선열들의 참혹한 독립투쟁, 광복의 숭엄한 의미와 가치를 폄하·간수하는 데만 급급, 많은 국민들 특히 새로운 세대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바로 알려 미래의 강한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교훈과 각성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소견을 피력한다.

일본은 1910년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탄, 국권침탈과 경제착취, 식민통치로 모든 것을 빼앗고, 일제 침략전쟁의 제물로 700여만 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200만 명을 살상케 한 야수적 강권지배로 통한의 50년을 짓밟았다(일제의 실제 식민통치 기간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1945년 해방 된 날까지로 간주). 당시 조선 인구는 1910년에 1,742만 명, 1944년에 2,512만 명으로서 어린이와 노인, 나이 든 부녀자와 친일 동조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끌려 나갔다. 일제는 사람만 죽인 게 아니다. 조선인의 민족성 말살정책으로 관변어용학자들을 동원, ‘조선사편수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한민족의 시조 ‘단군’을 포함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 2천년을 깎아 없애버렸다. 조선역사를 편찬한다는 구실로 전국에 흩어진 고대 역사서 23만권을 수집, 모조리 불살라버리는 등 역사를 왜곡·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말도, 한글도, 사람의 성도, 이름도 빼앗고, 국토자원과 재화도 모두 강탈해갔다. 농민의 유일한 생존수단인 농토를 빼앗아 주한 일본인들에게 나눠주고, 소작인으로 생산되는 양곡도 대부분 수탈해갔으며, 심지어 총탄을 만든다고 집안의 모든 철기구와 놋숟가락까지 거둬갔다. 한국인의 토속신앙 즉, 신(神)까지 죽였다. 각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신단(神壇)을 만들어 아침마다 일본 천황을 위해 참배하게 했고, 1942년에는 조선 신궁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만도 264만8천명에 이르렀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50여 명이 순교하고 2,000여 명이 투옥됐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은 어느 곳이나 그 처지가 비슷하겠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만큼 야수적 만행으로 하나의 민족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나라는 동서고금에도 없었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무자비한 만행은 애당초부터 강력한 무단통치로 조선을 병합하기 위한 목적에서 저질러진 것이다. 1930년대 영국이 3억4천 만 명인 인도를 다스리기 위해 고작 12,000명의 관리를 파견했는데, 일제는 2천2백만 명의 조선 통치를 위해 52,000명이나 되는 자국의 관리를 배치했다. 침략국 관리자 1명이 식민지 백성을 통제하기 위해  인도의 경우 28,330명을, 조선은 423명 기준으로 배치됨으로서, 서구의 일반적인 침략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67배의 폭압적인 탄압을 받은 것이며, 서구 식민지 국가와 동일한 수준의 고통을 받은 것으로 평가한다면 일제의 피침기간은 36년이 아닌 장장 2412년에 해당하는 탄압을 받은 것이다. 적어도 인도에 대한 식민 통치보다 6~7배 정도의 강도 높은 탄압으로 간주하더라도 240년 동안 일제의 무단통치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참혹하고 장구한 폭압을 ‘불과 36년간 지배당했을 뿐’이라고 어찌 남의 나라일처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 앞에서 다같은 한국인은 아니었다. 인두겁을 쓴 한국인(친일)의 위세는 아직도 당당하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는 왜인(倭人)인지 중국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반민족·반국가행위를 서슴지 않는 자들이 고위계층에 많다. 민족의 분화를 획책하고 미래의 국가안위와 발전을 더디게 하는 세력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세월이 약이 아닌 예외다. 이 나라의 독립과 광복, 자유의 가치를 폄하하는 자들은 일본사람인가? 친일 대변인인가? 통탄해 마지않는다. 강점 후 일제는 한민족을 두고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 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 민족이라고 비하하고 능멸했다. 한일합방은 조선이 원해서, 천황에게 복종하고 싶어서 했으며, 심지어는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열복(悅服: 기뻐 복종함)한다고까지 선전했는데, 인두겁을 쓴 한국인들이 능멸을 자초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권침탈 후 해방시까지 조국독립 투쟁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우리의 조상들이 60여만 명에 이른다. 누구도 독립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강압적 회유와 잔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조국과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은 물론 처자권속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고 목숨 바쳐 싸웠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나간 독립투사들의 모습>
일본군이 장난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 부분을 가리키게 해놓았다.
저런 끔직한 일도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애국선열들은 국가가 있어서 싸울 수 있는 총을 준 것도 아니고 칼을 준 것도 아니다. 오직 구국일념으로 항전했다. 외롭고 험난한 독립투쟁 전선에서 피눈물의 참혹한 고문과 살육의 생지옥을 넘나들며 끝내는 수많은 선열들이 민족의 제단 앞에 자신을 바쳤으며, 이렇게 최후를 맞은 항일 독립운동관련으로 학살된 선열들이 최소 15만 명에 이른다. 일제의 야수적 만행과 치욕과 수난 속에서 수십년을 피눈물 흘리며 저항해 온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결사적 투혼·참혹한 죽음을 그 누가 헛되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독립투사들은 조국 광복의 기쁨도 보지 못한 채 식민통치기간 36년보다도 더 짧거나 못다핀 생애로 인생을 애처로이 마감했다.(안중근; 31세, 류관순; 18세, 이봉창; 32세, 윤봉길; 24세, 조명하; 23세, 황병길; 35세, 장진홍; 35세, 오동진; 41세)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 학살된 유해들>

일제의 식민통치 36년간을 역사흐름의 짧은 한 과정으로 여겨 온 친일파 또는 그 후손들은 친일행위의 값비싼 대가로 일제 하에서 신분상승과 명예와 복록을 받고 처자식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생존의 위협이나 탄압이 전무한 가운데 타고난 천수를 다하고 있다. 또 자식들은 고급교육을 받아 건국정부의 능력자로 발탁돼 일제 통치 하의 모든 수혜를 받고, 권력과 부와 명성은 대를 이어 부풀려져 대한민국의 최고위 노블레스(noblesse) 층으로 수직 상승한 반면, 생존의 위협 속에서 전 재산을 쏟아 붓은 독립선열들의 후손들은 계속되는 탄압과 이주로 가난에 쪼들리고, 교육의 기회마저 잃고 무지와 굶주림의 최하위 소외계층으로 전락, 지금도 대부분 빛바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독립투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공헌, 광복의 원천과 숭고한 가치를 함부로 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얼마 후면 제93주년 삼일절이다. 일제에 짓밟힌 국치와 치욕적인 잔악상을 수치로만 여겨 교훈을 삼지 않고 간수한다면 치욕의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역사의 진리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일제의 폭압통치와 참혹한 중대사건을 되돌아보자. 첫째, 3·1운동은 일제의 축소된 통계로 보더라도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 총 1,542회 시위에 202만 3천여 명이 참가, 살해된 자가 7,509명, 부상당한 자 45,562명, 구속된 자가 49,811명이나 된다. 3·1운동으로 세계 제국이 일제의 식민통치가 악랄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주시하게 됐다. 둘째, 훈춘 대학살사건과 간도참변이다. 1920년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대패(독립군측 전사 60여명, 일본군 측 사망 자 1,200여명)를 당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3개 사단을 출동시켜 한국인을 무조건 잡아들여 총살하고 불태우는 등 무차별적인 학살 작전을 3~4개월 간 전개, 일본군 통계로 조선인 학살 3,700여명, 체포 5,058명 및 가옥 2,500여동, 양곡 4만5천여섬을 불태웠고, 한 관동군 부대는 ‘연길현 춘향’에서 동포 100명을 코를 끼워 5㎞ 거리를 끌고 다니다가 생매장했다.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 수는 무려 3만명에 이른다. 셋째, 관동 대지진 한국인 대학살 사건이다.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 14만여 명이 사망했다. 일본정부는 민심이 극에 달하자 한국인 ‘폭동설’ 을 조작 유포시켜, 일본인과 군경이 아무 죄 없는 조선인을 몽둥이·죽창 등으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대학살사건으로 살해된 한국인이 6000~7000명에 달한다. 넷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이다. 일제는 1945년 8월18일 전범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 강제 징용됐던 7,000명의 한국인을 긴급 송환하고자 4,740t급 일본 해군군함 ‘우키시마호’에 탑승시켜 동년 8월 21일 북동쪽 ‘오미나토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8월24일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동해연안의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 침몰한 사건으로서,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명으로 발표됐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에 의하면 총 1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승선했고, 최소 5,000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다. 사고원인은 동승한 일본 해군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자폭설이 유력시된다. 이들 대부분은 북해도 등 일본 동북지방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으로 노예처럼 연명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서,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즐거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다섯째, 한국인 강제징병 총알받이 21,000위 ‘야스쿠니신사’ 신주(神主)가 돼있다. 일제는 1941년까지 160만 명의 한국인을 강제 징용, 일본의 공장·건설현장· 탄광·농장으로 노동력을 착취해갔다. 특히 강제징병으로 94만명의 조선 청년들을 전장의 총알받이로 삼고 한푼의 배상도 하지 않고는 엉뚱하게 영령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을 위해 전사했다’ 는 이유로 ‘야스쿠니’가 제사지내는 한국인이 21,000명에 달한다. ‘야스쿠니신사’에는 그들의 전쟁영웅인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있으며, 이들과 함께 제사지내지는 사실에 한국인으로서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염치로 자기나라의 전쟁영웅을 추모하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해 어떤 특정한 날이면 수상·각료·국회의원 등이 참배하는 꼴은 소도 웃을 일이다. 이처럼 비열하고 간계한 나라가 일본이다. 훗날 ‘조선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또 다른 역사왜곡을 미리 준비해 두려는 것이다.

일본은 수백만 명의 민족말살과 야수적 만행을 저지르고서도 2011년 8월4일자 조선일보에서 “일본은 오늘 날까지도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거나 참회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라고 지적한 것처럼, 일본 천왕의 사죄나 반성·희생자에 대한 적절한 배상은커녕, 1945년 8월15일을 국가 패망일로 정해 신사참배를 하고, 그날을 상기하며 새로운 제패를 다짐하고 있는 바,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은 1945년 원폭에도 죽지 않았다. 모름지기 일본은 임진왜란부터 우리나라를 무려 600회 이상 침략했으며, 일본인의 본성인 침략적 근성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100여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살아 숨쉬며 틈만 나면 여러 형태로 침공을 가해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동일한 전범국가인 독일이 아닌 일본이라는 불량국가가 우리 대한민국과 이웃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일본은 지금 이순간도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 교육, 위안부할머니들의 사과 요구와 태평양전쟁 영웅 A급 전범 14위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한국의 젊은 영혼 21,000 위의 송환 거부, 원폭피해자 피해보상 요구 불인정, 극우파 정치인들의 망령·혐한활동과 반 한류시위 등 일본의 침략적 계략과 침탈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왕실 의궤 일부 반환에 감동·감화할 일도 아니다. 수만점의 약탈 문화재 가운데 극히 일부(2%)에 지나지 않으며, 1922년 조선총독부 ‘이토히로부미’가 의궤를 일본으로 방출한지 90년이 지나고 나서야 의궤 1,205책을 반환한 데 대해 오히려 책망할 일이다. 2011년 12월6일 현재까지 파악된 국외소재 우리 문화재는 14만점에 이른다. 아직도 일본에는 6만점의 우리 문화재가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속담에 ‘저녁에는 죽일지라도 아침에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의궤 몇 책 반환 뒤의 간계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보다 5배 이상의 월등한 국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확대 정책을 추진, 2016년까지 해상전력을 2만톤급 항공모함 3척을 증강 배치할 계획이며, 2007년부터 한국을 제외한 미국-일본-호주 3국간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태평양상 에서 '도서 탈환 상륙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들이 독도침략의 핵심 전력이 될 것은 자명하며, 한국의 군사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또 미국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한·일 양국 간의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100년 전부터 그래왔듯이 항상 일본 편이었다. 국제사회에 있어서도 한·일 문제는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고, 나라를 빼앗긴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에게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교육’과 같은 침략성 도발은 경제·문화 등 삶의 질 문제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생존의 문제로서, 일제에 의한 대한민국의 강제병탄과 국권 침탈, 식민통치의 야수적 만행을 경미한 일과성사건으로 간주하는 친일적 성향의 역사의식과, 독립투쟁의 공헌과 광복의 숭엄한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불순세력의 매국적·반민족적 획책을 개탄한다. 더불어 광복절을 견지하려는 세력을 무조건적으로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려는 구태(舊態)도 삼가해야 한다.

201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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